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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 로테이션 02

"진짜 몸도 가을 타나?"


부르르 몸을 떨며 대충 걸친 후드집업 지퍼를 올린 지민이 중얼거렸다. 자려고 했더니 이게 무슨 봉변인지. 솔직히 말해 차에서 잠깐 눈을 붙이는 거라 잔다고 할수도 없겠지만. 웬만하면 한 번 잠들었다가는 잘 깨지도 않는 주제에 밤 12시가 넘어서 기어이 화장실이 급해 눈을 떴다.


생각보다 추운 바깥 날씨에 나오자마자 기겁을 하고 다시 차에 들어가 후드집업을 챙겨온 지민이었지만 숭숭 뚫린 미세한 구멍들로 들어오는 가을 바람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추위는 딱 질색인데. 웅얼거리며 코를 파묻었다.


"빨리 갔다가 자야지."


이제 아예 작정을 한 터였다. 아까 낮까지만 해도 이딴 직장 그만둬 버리겠다느니, 민윤기를 가만두지 않겠다느니 뭐라고 지껄였는데 생각해보니 이만한 스펙도 없는 23살 젊은이를 누가 또 받아준단 말인가.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워지는 통장 잔고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윤기가 재수없는 성격인 것은 천성인 것 같으니 봐주고 넘어가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 쪽보다는 이 쪽 성격이 훨씬 나은 것 같으니까. 감기도 잘 걸리는 체질에 집에 돌아가지도 않고 기어이 차에서 자겠다고 다짐한 지민이었다.


오늘처럼 늦잠을 자서 지각했다가는 정말로 쫓겨날 것만 같아서. 그걸 원하지도 않았고 더이상 미간을 잔뜩 구기며 한숨을 내쉬는 윤기의 모습을 보고싶지도 않았다. 이상하게 그런 쪽으로만 오기가 생겼다. 두고봐, 내일은 내가 그쪽보다 일찍 올테니까.


엣취, 그 새 추웠는지 멈춰서서 한 번 재채기를 한 지민이 잔뜩 간지러운 코를 부볐다.


"쓸데없이 추워."


오소소 떨리는 몸을 팔짱 끼고 겨우 견뎌내고 있었다. 오늘따라 연습장에 딸린 화장실로 가는 길이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한 걸음씩 연습장을 향해 내딛는데.


"어...?"


이런. 저건 또 뭐야. 우뚝 걸음을 멈춘 지민의 눈꼬리가 한껏 내려갔다. 가뜩이나 내려간 눈꼬리가 처량해 보일만큼 그렇게 한참을 쳐다보고 있던 지민이 무언가 모를 신음소리와 함께 그대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아...누구야..."


이런 시간에 불 켜놓고 그대로 간 사람. 짜증이 끝까지 차올랐다. 연습장을 혼자 쓰는 것도 아니고. 제발 끝까지 썼으면 끝까지 마무리하고 나올 것이지. 나중에 내가 혼난단 말이야. 변명 아닌 변명과 궁색한 짜증을 내던 지민은 가만히 있어봤자 될 게 없다는 생각에 툴툴 거리면서 다시 걸음을 바삐했다.


이미 새벽을 향해가고 있는데 그 때까지 눈치 못 챈 본인의 잘못도 있다는 걸 잘 알고있었기 때문이었다. 더이상 윤기에게 쓴소리를 듣기는 싫었다. 가까이 가면 가까이 갈수록 밝아 보이는 연습장 내부에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새벽까지 남아있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내일 와서 불 켜진 걸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만 해도 치가 떨렸다.


화장실을 가려고 나왔다는 건 가을 타는 게 아니라 그냥 일종의 몸이 주는 신호였던 건가. 말도 안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피실 웃으면서 손가락들을 꼼지락거렸다. 그런 점은 좀 감사하네.


"어서 끄고 자야ㅈ..."


끙끙 대면서 이미 차가워질대로 차가워진 문의 금속 손잡이를 잡아당기고 여는 순간.


"아."


환해진 연습장 안에서 약하게나마 들리는 소리는,


"시발..."


욕소리였다. 놀라기도 전에 왠지 모르겠지만 문득 구석에 황급히 숨었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숨고 나서야 왜 숨었나 싶은 생각이 들긴 했지만. 갑자기 들린 욕소리는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들어온 지민에게는 충분이 위협이 될만한 요소였다.


누구인지 확인할 겨를도 없었기 때문에 차마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욕짓거리가 들린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곧이어 둔탁한 소리들이 귓전에 울렸다. 얼음이 갈리는 소리. 뛰어오르느라 나는 날카로운 소리. 뒤이어서 나는 또다시 무거운 둔탁한 소리.


무슨 소리인가 싶어 링 근처로 가서 빼꼼 고개만 내밀었더니 놀라움에 입을 벌리지 않을수가 없었다.


"거짓말이지...?"


눈을 껌뻑이다가 고개를 돌려 저 멀리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봤다. 새벽 1시, 늦은 시간이었다. 링 위에 있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윤기였다. 아침에 입었던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땀은 흐를대로 흘러서 앞머리는 잔뜩 젖어있고. 누가봐도 쉬지도 않은 채 지금까지 연습을 한 모양새였다.


이 시간까지 연습을 해? 아까 여기 온 시간만 해도 새벽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새벽. 12시간은 훨씬 넘겼을 연습 시간에 바짝 입 안에 타들어갔다. 지치지도 않는 건지 몇 번이고 턴을 돌던 그가 점프 한 번을 하더니 공중에서 자세가 흐뜨러지고 뒤이어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했다.


순간 윤기의 표정에 보이는 한껏 짜증나는 표정과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 치는 모습을 차마 볼수가 없어 질끈 눈을 감은 지민이 다시금 들려오는 선명한 욕소리에 슬그머니 눈을 떴다.


"...존나게 안되네."


한숨을 내쉰 윤기는 지치기도 제법 지쳤는지 얼음 위에서 한동안 일어설 생각이 없어보였다. 바쁜 숨을 몰아내쉬며 얼굴 선 위로 흘러내리는 땀을 간신히 닦아낸 그는 연습장 천장에서 내려오는 빛도 더운지 위로 시선을 돌렸다가 괜히 미간만 좁히고 다시 고개를 내렸다.


누가봐도 짜증나는 표정. 대체 뭘 한다고 이 시간까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곰곰이 생각을 해보던 지민은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한가지 말을 떠올렸다. 분명, 피겨 그랑프리 시리즈 파이널 남자 싱글 1위 노린다고 들었는데.


그걸 위해서 분명 연습 강도를 높인다는 말은 익히 들었다. 그걸 견뎌내겠다는 말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던 윤기의 모습도 기억하고. 그런데 저 정도로 고난이도 기술을 익힌다고는 못 들었는데? 그러고보니 평소에는 보지도 못했던 자세를 하고. 보지도 못했던 점프를 하고.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지민의 눈에는 악셀이 뭔지, 플립이 뭔지. 알 턱이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윤기가 새로운 기술에 도전 중이었고 그게 지금 되지를 않아서 한참 짜증이 났다는 것. 그거 하나 뿐이었다. 지금 나가서 아직 집에 안갔다고 해봤자 불유쾌한 표정으로 쳐다볼 것이 뻔했고 일을 귀찮게 만들고 싶지도, 그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도 않아서 가만히 있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자주 덜렁거리는 모습만 보여줘서 그런지 차마 지민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티를 팍팍 내던 그는 스트레칭이 필수라고 몇 번이고 소매 끝을 잡으며 말해도 무시한 채 그대로 손을 떨궈냈다. 그 때마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안되는데, 라고 중얼거릴 뿐이었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스트레칭에 관해서라면 간과할 수가 없었다.


다름 아닌, 무용수로서의 은퇴길을 밟게 된 것이 단순한 스트레칭을 안 했기 때문이니까. 그 날, 스트레칭만 제대로 했어도 그렇게까지 다칠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지금도 지민은 생각했다. 지난 날들, 지난 과거지만. 승부욕이 센 편에 속하는 윤기가 지민의 말을 들어줄 리도 없었고 수용해 줄 일도 없었기 때문에 보나마나 지금까지 호되게 연습하면서도 가르쳐준 스트레칭은 하나도 하지 않았을 그를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불편했다.


걱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토록 심한 말들과 심한 대우들을 듣고서까지 그를 걱정해 줄 착한 위인은 세상에 없을 것이라고만 여겨졌다. 그렇게 쳐다보고만 있다가 내가 나서봤자 무슨 말을 해, 라는 생각과 동시에 다시금 빙판 위로 눈을 돌렸을 때 순간 맞닥뜨린 광경에 위험하다는 말만 입 안에서 맴돌았다. 아까까지와는 달리 한번에 크게 도약한 그는 말릴 새도 없이 큰 소리와 함께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윤기씨!!!"


둔탁한 소리와 함께 소름끼치는 공포감이 온 몸을 휘감았고 뭐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놀란 몸은 그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었다. 망설이지도 않고 그대로 얼음 위로 뛰쳐 올라가서는 일어서지도 못하고 주저앉아 무릎을 감싸쥐는 윤기를 시선에 담았다.


아. 그런데 잊고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면.


"엄마야...!!!"


지민은 얼음 위에 도통 서있지를 못한다는 것이었다. 분명 윤기가 다쳤는지 안 다쳤는지 확인을 하러 간 거면서 꼴이 웃기게도 얼음 위로 한 걸음을 내딛자마자 휘청하는 감각과 함께 그대로 엉덩방아를 찍고 넘어졌다.


"박지민...?"


엉덩이에 닿는 감촉이 생각보다도 차가워서 창피하기 이전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니, 한 마디로 말해서 엄청 아팠다고. 윤기가 멀리서 부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차마 일어서지도 못하고 우왕좌왕 하고 있는데 조금의 신음소리와 함께 겨우겨우 얼음 위로 일어선 윤기가 멀리서 입구까지 오고 있었다.


"이 시간에 네가 여길 왜있어."

"아니...그게요...저어..."


금세 앞까지 와서는 넘어진 지민을 내려다 보는데 눈을 맞출 생각은 못하고 고개만 푹 숙였다. 이미 말투 자체에서 화난듯한 어조가 느껴졌다. 일냈다. 괜히 나섰나. 뭐라고 변명해. 머리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데 선뜻 위에서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머리 굴리는 소리 다 들린다, 임마."

"네...?"

"안 혼낸다고."


슬금슬금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는 지민을 바라보고 있다가 한숨을 쉬며 그는 손을 내밀었다.


"너는 대체 애가..."

"......"

"왜 그렇게 칠칠맞지 못하냐."

"그게..."


대답할 말도 없어서 입만 뻥긋거리고 있는데 그가 내민 손을 맞잡기도 전에 윤기는 가볍게 지민을 일으켜 세웠다. 단숨에 올려지는 몸에 놀라기도 잠시 한심하게 쳐다보는 눈과 시선이 마주쳐서 괜스레 얼굴이 화끈거렸다.


"일어서는 거."

"......"

"못해?"

"못하는 게 아니고 힘든건데...요..."

"결론적으로 못하는 거잖아."


무표정으로 쳐다보며 내뱉는 말에 뭐라 더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괜찮냐고 물어봐주려고 간건데. 도리어 도움을 받고 말았다. 몸이 더 닿기도 싫은지 거의 밀다시피 지민을 링 밖으로 보낸 윤기는 뒤따라 나가 그대로 벤치에 앉았다. 한숨을 내쉬면서 목을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한 번 꺾은 그는 그간의 연습 시간을 보상이라도 하듯 뚜둑 하고 나는 뼈소리에 언뜻 미간을 좁혔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때마침 연습장 안에 코코아가 있다는 사실이 생각나 급하게 달려간 지민은 황급히 뜨거운 물을 부은 두 컵을 들고 윤기가 있는 벤치로 날랐다. 저만치서 뛰어오는 걸 보고 저러다 또 넘어지지, 라고 조용히 생각한 윤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 그렇게 급하나 싶었는데 장갑을 벗고 한껏 달아오른 손을 식히려고 할 때 쯤 눈 앞에 떡하니 내미는 컵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뭐야."

"코코아요."


우물쭈물 내뱉는 말에 지민을 올려다본 윤기는 컵에 시선을 내리고 지그시 쳐다보더니 딱 한마디 했다.


"마시라고?"

"연습하고 나면 달달한 거 먹고 싶지 않으세요?"

"다이어트."

"네?"

"나 다이어트 중인데."


그 말에 말문이 턱 막혔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전지 훈련이 얼마 남지도 않아서 좀 더 몸을 날렵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에 밤낮 가릴 것 없이 운동부터 시작해서 식이요법까지 하고있는 국가대표 선수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미쳤지, 박지민. 다이어트 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코코아까지 내밀고. 그것도 이렇게 늦은 새벽에.


"넌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없는 것 같아요. 마음 같아서는 그렇게 말하고 눈물까지 줄줄 흘리고 싶은 걸 꾹 참고 내밀었던 잔을 어색하게 바라만 보고 있다가 지민은 다시 그 잔을 제 쪽으로 당겼다.


"제가 두 잔 다 마실게요..."


중얼거리면서 윤기의 옆에 앉아 오른손에 들린 코코아를 후룩, 하고 들이마시는데 잔뜩 속상한 표정이 된 지민을  뚫어져라 쳐다보고있던 그가 손을 뻗어 왼손의 것을 단숨에 가져갔다.


"아...!"

"왜."

"코코아..."

"나 마시라며."


근데 윤기씨 다이어트 중이잖아요. 울상이 돼서 말하는데 흘긋 지민을 보고 단숨에 한 잔을 통째로 들이켰다.


"내일 굶으면 돼."


그 말 한마디에 잠깐 심각해지더니 또 금세 풀리는 표정에 참 뇌구조 단순한 녀석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마셔줘서 기쁘다고 티라도 내는 것인지 지민의 입꼬리가 포슬 포슬 올라가는 것을 보고 왠지 모르게 그건 또 느낌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쳐다보고만 있었다.

JM BOTTOM/ONLY SUJ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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