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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 로테이션 03

이미 잔을 비워버린 코코아는 거무스름한 단물만이 조금 남아있었다. 차마 설탕덩어리라고 생각하니 들이킬 수는 없어서 지민이 안 보는 틈을 타서 슬쩍 옆으로 내려놓았다. 솔직히 말해서 윤기는 달달한 걸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항상 커피도 쓴 아메리카노.


깊게 나는 쓴맛이 왠지 모르게 좋아서 단 걸 별로 마셔본 적이 없는데. 옆에 앉은 이 아이는 반대인지 그게 맛있다고 잘도 마시는게 신기했다.


"안달아?"

"다니까 맛있는 거잖아요."


그렇게 말해오니 막상 또 반박할 말은 없다 싶어서 관뒀다. 자기가 좋다는데. 마시게 하지 뭐. 그러고보니 이렇게 단 둘이 앉아서 얘기하는 건 지민이 입사한 이례로 처음이었다. 아니, 매니저가 생긴 이례로는 처음인가. 마음을 잘 주지 않는 성격 탓에 아무도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것 쯤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발목은요?"

"어?"

"아까 안 다쳤어요? 무릎도 부딪혔죠?"


다친 건 이쪽인데 표정은 울상이다. 그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괜히 보고 있기가 거북해져서 고개를 돌렸다. 발 좀 봐요, 다 마시지도 않은 코코아를 내려놓고 금세 앞에 내려와 쭈그려 앉은 지민은 스케이트 슈즈를 벗어보라고 말하는 동시에 이미 끈을 풀고 있었다.


"야."

"다쳤는지 안 다쳤는지만 볼게요. 그게 제 일이잖아요. 맞죠?"


웃으면서 물어오는데 괜히 나섰다고 말하기에는 늦은 터라 냅두기로 했다. 검정 끈이 스르륵 풀리고 드러나는 발에 지민이 위로 올려다보며 물었다.


"엉망이잖아요..."

"그 정도는 익숙해."


양말을 벗겨내자 시퍼렇게 드러나는 멍에 경악했다. 속상한 티를 팍팍 내며 윤기와 발을 번갈아 보는데 정작 당사자는 별 일 아니라는듯 어깨를 으쓱했다. 지민이 무용을 하던 때에도 이렇게 다친 적은 없었는데. 아무래도 발을 기본적으로 쓰는 피겨이다 보니 곳곳에 난 상처와 물집들, 그리고 굳은살들까지.


"안 아파요?"

"안 아파."

"......"

"그리고 아파도 참아야 되고."


어느새 얼음을 잔뜩 들고 와서 얼음팩을 만들어서는 제 발에 붙이고 있는 지민에 미간을 구기며 떼라고 말했지만 그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저 매니저이기도 한데요, 코치기도 하거든요?"

"금시초문인데. 그거."


처음 듣는다고 말하자 지민은 입술을 삐죽이며 윤기를 올려다봤다. 가뜩이나 추운 날씨에 후드집업을 하나 걸치고 더 추운 빙상장 안에 들어와 있으니 추운 모양이었다. 두 뺨이 상기돼서 잔뜩 붉어져 있었다. 한참 연습 후에 지민 덕에 쉬러 온 터라 아직도 달뜬 열을 내뱉는 몸에 딱 이 정도의 시원함이 좋다고 느낀 윤기는 알 턱이 없었다.


"왜 그렇게 연습 힘들게 하시는 거예요?"

"......"

"저번에 올림픽에서 금메달도 땄잖아요."


웅얼거리면서 말하며 눈치를 보길래 손을 들어서 지민의 이마를 툭 치고 넘어뜨렸다. 쭈그려 있던 탓에 반동으로 그대로 뒤로 넘어진 지민은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언뜻 울분 섞인 표정으로 윤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걸로 만족하겠냐."

"그럼 뭘 더 해야 하는데요. 이만하면 됐는데...욕심 아니에요?"

"욕심. 부려봐야지, 안 될 때까지는. 근데 나는,"


아직 되잖아. 저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솟는건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길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씨익 웃는 모습이 사뭇 평소와는 달라보였다. 이 사람은 웃을 때 이렇게 웃는구나.


"그랑프리 파이널. 금메달 노릴거야."

"네???"


화들짝 놀라서 눈을 크게 뜨며 일어서자 뭘 그렇게 놀랄 일이냐고 오히려 되물어왔다. 그야, 놀랄만도 했다. 그랑프리 시리즈는 지금까지 윤기가 한번도 따보지 못한 상이었고 노릴만도 했지만 강자들이 많아도 너무나 많이 넘쳐났다. 그가 메달을 딸 수 없다고 얘기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것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연습하는 거예요?"

"그만한 이유로 충분하지 않나."

"뭘 더 연습하시는 건데요?"


4회전 플립. 어깨가 뭉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뻐근한 것인지 툭툭 본인의 어깨를 두들기며 괴로운듯 이리 저리로 움직이던 그는 한숨과 함께 한마디 내뱉었다.


"나이도 다 차가는데. 솔직히 나같은 피겨 선수들은, 나이가 지나면 끝이고 수명도 단절이야."


갑자기 무거워지는 얘기에 지민이 뭔가 대답을 하려다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



지이잉, 문득 어디선가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 침대 안에서 평화롭게 휴가를 보내고 있는, 아니 보낼 예정이었던 지민은 일어나기도 싫은지 신음소리를 내며 다시금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지만 연달아서 받으라고 독촉이라도 하는 것인지 끊기지도 않는 휴대폰 진동 소리에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오늘은 쉬게 해줘라, 쪼오옴."


오늘은 한 달에 딱 두 번 있는 휴식 시간이었다. 윤기도 이 날은 연습을 하지 않고 집에 돌아가 자거나 운동을 하기 때문에 여유로운 휴가였는데. 그걸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햇볕이 들어오기 시작한지도 얼마 안된 것 같은데 휴대폰은 지민의 단잠을 깨웠다.


윤기와의 코코아 사건이 있던 것도 어언 2주일. 그의 짜증에도, 그가 가끔 보이는 멋진 모습에도.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대응하는 것도 빨라졌고 이제 더이상 이온 음료를 까먹는 경우도 없었으며 윤기가 윽박지르는 횟수도 점차 줄어가고 있었다.


사실 윤기의 성격이 바뀌었다기 보다는 그 날 그의 이야기를 듣고 지민의 마인드가 바뀌었다고 표현하는 게 더 옳을 것이다. 생각도 못했을만큼 어두운 이야기에 집에 들어와 곧장 '민윤기'를 검색했다. 곧장 좌라락 뜨는 여러 개의 팬클럽을 제쳐두고 인터뷰 기사나 그의 관한 정보가 실려있는 것들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었다.


생각 외의 결과였다. 지민이 부모님의 사소한 권유로 현대 무용을 시작한 경우였다면, 윤기는 강제로 시작하게된 최악의 경우였으니까. 대개 이런 경우에는 금방 포기하지 않나? 그런 의문점이 한 둘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현재 그는 피겨 국가대표니까. 제법 열심히 길을 달려온 것 같은데.


예상대로 윤기와 동일하게 하이스펙을 가진 그의 부모님들은 윤기를 보는 것도 자주 보러오지 않는다고 적혀있었다. 아무래도 바쁘기도 했고, 보러와봤자 잘난 아들은 피겨스케이팅 연습을 해야하니까. 그런 탓인가. 사람에 대한 유대나 부모님의 대한 애정은 눈꼽만큼도 없다고 과거 훨씬 어린 시절의 윤기는 말했다.


괜히 그런 기사를 읽으면서 마음이 뭉클해졌다. 하지만.


"아 진짜아..."


지금 울리고있는 휴대폰과는 전혀 별개였다. 기어이 부스럭거리며 일어나 짜증나는 투로 전화를 받은 지민은 퉁명스럽게 여보세요, 라고 말했다.


-지민씨?

"...누구?"

-아, 네. 윤기 회사 사장인데.


그 말 한마디에 회로가 굳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화들짝 놀라 침대에서 우당탕 내려온 지민은 전화라 보이지도 않을 것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무릎까지 꿇고 다시 전화를 받았다.


"네, 네!"

-미안해요, 자고있는데 깨웠나요?

"아니요!!! 그럴리가요!!!"


사장님에게서 전화가 오다니. 계약서를 쓰던 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푸근한 인상이 느껴지는 중후한 나이의 남성. 꿀꺽 침을 삼키며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자 그는 말없이 깊은 한숨을 내쉬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휴일이라 미안한 거 잘 아는데, 혹시 괜찮으면 지금 윤기 집으로 가줬으면 해서요.

"윤기씨 집이요...?"

-휴가만 되면 집에 틀어박혀서 나오지도 않거든요. 먹지도 않고. 원래 잘 안 먹는 녀석이라 더 그렇지만. 집도 엉망일 거예요.


저번 매니저는 치워주다가 포기를 해서 아마 지금까지 쌓여있거나 더러운 것들이 많을 것이니 결론적으로 집에 가서 치워주고 윤기를 사람 꼴답게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는 요구였다. 그 말에 뒷머리를 긁적이던 지민은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윤기씨 집을 가? 지금? 휴일인데? 솔직히 휴일이 아깝기는 했지만 사장님의 말이 도저히 거짓말같지는 않아서. 실제로 연습을 마치고 차로 집까지 바래다 준다고 하면 뒤를 돌아봤을 때는 이미 말을 걸 수 없을 정도로 깊게 잠들어버린 적이 여러번이라. 전적은 충분했다.


어느새 뚝 끊긴 전화를 바라보다가 에이 모르겠다 싶어서 화장실로 직행할 때 쯤 다시 전화기가 울렸다.


"아 또 뭐야아."


입에 칫솔을 문 채로 화면을 보자 다른 누구도 아닌 '엄마'였다.


"여오에오(여보세요)"

-뭐야, 지민이 핸드폰 아니야?

"아이 아응데 아우에 어아애(아니 맞는데 나중에 전화해)"

-뱉고 말해 이년아.


들려오는 호통 소리에 황급히 입 안에 잔뜩 들어있던 거품을 내밀고 물로 헹군 지민은 세면대 위에 놓여있던 휴대폰을 다시금 귀에 갖다댔다.


"왜."

-엄마한테 왜가 뭐야, 왜가. 내가 집 들려서 반찬 찾아 가랬잖아. 왜 안와?

"나 좀 바빠. 지금 윤기씨 집 가봐야돼."


순간 그 말을 내뱉고 정적이 흐르자 뭔가 잘못했나 싶다가 순간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 황급히 정정했다.


"아니!!! 이상한 뜻이 아니고. 나 취업했는데 내가 담당하는 사람 집 치워주로 가는 거야."

-누가 뭐래? 근데 윤기씨? 그게 누군데. 네가 담당한다고? 무슨 말이야.

"내가 매니저로 취업했거든. 정규직이기도 하고. 월급도 꽤 나와. 그러니까 이제 나한테 용돈 안 줘도 돼."

-매니저? 누가 연예인이라도 해? 윤기...


설마 민윤기 말하는 건 아니지? 들려오는 소리에 일났다, 싶었다. 무슨 일만 나면 끝까지 캐내려고 드는 심보때문에 전화 안 하고 싶었던 것인데. 집안에서 잔뜩 씹어질 재밌는 주제를 찾았다는 듯 말투 자체부터가 신나게 느껴져서 지민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그 민윤기 맞아."

-어머, 어머! 웬일이야! 진짜 그 국가대표 민윤기?

"어."

-얘 좀 잘해봐. 얼굴은 훤칠하더만. 너한테 관심은 없대?

"무, 무슨 소리야!!!"


엄마의 말에 얼굴이 훅 달아오른 지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윤기씨가 나한테? 미친소리지.


-아니 뭐, 이상한 뜻은 아니고. 너도 연애 좀 하고 살아야지. 좋은 기회 아니야?

"그런 거 아니고. 진짜 공적인 관계야. 신경 좀 그만 써."

-얘는? 기대되니까 그러는 거지.

"됐네요, 무슨 기대야. 끊어. 나 이제 가야돼. 반찬은 다음에 갈게."


지민아, 박지민! 외치는 소리도 무시하고 그대로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선 그대로 욕조 맡에 주르륵 흘러내리다 시피 앉고서는 두 손으로 얼굴을 푹 가렸다. 엄마는 대체 무슨 말을 하는거야. 윤기씨하고 연애를 해보라니. 문득 그런 생각을 하니 다정하게 웃으면서 손을 잡아주는 그의 모습이 상상돼서 얼굴이 화끈해졌다.


"...원래 그렇게 차가운 남자들이 애인한테는 껌뻑 죽는다던데."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자기 뺨을 두어번 후려친 지민은 달아오른 얼굴을 위해서라도 식힐 겸 샤워를 할 필요가 있었다.


간밤에 같이 마셨던 코코아가 생각났다.

JM BOTTOM/ONLY SUJ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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