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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 로테이션 04

"아니 뭔 놈의 사람이 이렇게 높은 곳에 살아..."


헉헉 가쁜 숨을 내쉬고 드디어 윤기의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의 그 성취감이란. 이미 땀은 흐를대로 흐르고 있고. 애초에 걸어서 거기까지 가겠다고 생각했던 게 잘못이었다. 몇 푼 아끼겠다고 택시를 마다하고 걸어왔던 과거의 자신을 때려 갈기기라도 하고싶은 심정이 한가득이었지만 입술만 꾹 앙다물 뿐.


차로 몇 번이나 데려다 줬지만 정작 데려다 준 건 아파트 입구까지라서. 안으로 들어가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잊고있었던 게 제일 큰 실수였다. 입구 위로 이렇게 높은 경사길이 있다는 걸 누가 알았을까. 그러고보니, 그럼 윤기씨는 매일 이 높은 곳을 올라가는거야?


"하여간에 운동 머신인지..."


아니면 그냥 미친 사람인지. 중얼거리다가 겨우겨우 엘리베이터를 잡아탄 지민은 사장님이 문자대로 알려준 39층이라는 층수를 눌렀다. 괜히 국가대표가 아닌지라 사는 곳도 생각보다 너무 다른 세계 사람이었다. 방이 하나 딸린 원룸에 사는 지민과는 비교될 정도로 화려한 갖가지 것들에 가끔가다 크게 놀라곤 했다.


집도 그 중 일부인가. 갑자기 자신이 한심해져서 깊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래봤자 달라질 게 있나. 오늘도 단념하고 살아갈 뿐이지. 띵동,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떡하니 윤기의 집이 드러났다. 비밀번호를 알려줄테니 알아서 들어가라고 했던 사장님의 말이 머릿속에 상기되고 누르려던 찰나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아무리 그래도 마음대로 문열고 들어가면 기분 나빠할텐데..."


그것도 그렇게 성격 더러운 사람이. 멋대로 집 들어갔다가 매니저 일까지 잘리는 건 아닌가 싶은 걱정이 들었지만 사장님의 말을 듣지 않아도 목이 잘리는 것 똑같을 것 같아서 모르겠다, 싶은 심정으로 비밀번호를 꾹꾹 눌렀다.


"실례합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지민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뭐야..."


바닥부터 널브러져있는 옷가지들이며, 운동복들. 게다가 관리도 안된채 혼자 놓여있는 스케이트 슈즈들. 차마 발을 내딛기도 힘든 상황이라서 한 발자국씩 겨우겨우 들어가는데 그제서야 사장님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번 매니저가 치워주다가 포기를 했을 정도라고 했으니까. 그 심정도 이해가 갔다. 가지고 왔던 가방을 현관 앞에 놓아두고 들어가면서 옷가지들을 하나씩 주워서 가다보니 어느새 한 손에 가득 쌓인 옷들이 제법 볼만한 광경이었다. 이 와중에 자는 거야, 이 사람?


끙끙대며 소파 위에 간신히 옷들을 올려놓고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넓은 집이 이 정도로 더러워지는 것도 이만하면 기적이었다. 제대로 된 구석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그 후로 집을 잠시 돌아다닌 다음이었다. 침실로 보이는 문을 소리가 나지 않게 살짝 열자 그 안에 보이는 건 어젯밤 연습에서 돌아와 씻지도 않았는지 검정 폴라티 그대로 기절하다시피 침대에 누워서 자고있는 윤기였다.


시간이 대체 몇 시인데 지금까지 자나 싶었지만 보나마나 어젯밤도 늦게까지 연습했던 것이 명백했기에 냅두기로 했다. 다시 문을 닫고서 집안을 청소하기까지 대략 얼마가 걸렸을까.


"아...허리 아파..."


콩콩 잠깐 일어서서 허리를 두들기고서는 미간을 좁혔다. 어느 정도 더러워야지 이해를 할텐데 하다해도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 그릇을 정리해서 넣으려고 서랍을 여니까 수건들이 쏟아져 나오고. 화장실에 갖다놓으려고 화장실 서랍을 여니까 컵이 가득하고. 대체 왜 바꿔서 넣어놓은 건데?


집을 잘 안 쓰니까 이해는 하려 노력했지만 그래도 갈 곳을 한참 더 간 것 같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이 남자, 스케이트를 그렇게나 좋아하면서.


"스케이트 날 다 상하겠다..."


현관에 널브러진 슈즈들은 다 뭐람. 게다가 보호 장구까지 다 버려두고. 애처롭게 현관에 놓인 슈즈가 불쌍해 보여서 주워든 다음에 애써 천으로 닦아 가방 안에 넣어두었다. 이런 상태로 연습장까지 질질 끌고 들고오는 건가. 연습장 위에 올라가면 혹사 시키면서 집에 오면 찬밥 신세라니.


"너도 안됐다."


중얼거리며 듣지도 못하는 슈즈에게 말을 건넸다. 옷들을 전부 정리해서 입을만한 것들은 개어 장롱 안에 넣어두고 더러운 것들은 세탁기에 넣고 돌렸더니 집안에 제법 말끔해졌다. 이렇게나 넓으면서 아까 처음 마주했던 집안 광경이 떠올라 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원래 잘 안 치우고 사는 사람인가, 싶다가도 연습장에서는 누가 자기 물건을 함부로 만지는 걸 싫어한다는 사실이 떠올라 잠시 멈칫했다. 윤기가 동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집안에 동물을 키웠다가는 남아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에.


이제 슬슬 깨울 일만 남았다, 싶어 시계를 봤더니 벌써 3시가 다되어 가고 있었다. 휴일이 되면 늘어져라 잠만 잔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증명이라도 하는 것인지 아까부터 몇 번이고 시끄럽게 한 것 같은데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를 않았다. 슬그머니 방 안으로 들어가자 그 새 자세를 바꾸고 옆으로 돌아누워있는 윤기를 발견했다.


축 처져서 내려온 머리가 하얀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 덕에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볼이 정확히 드러나 있어서 가까이 볼 수 있었다.


"진짜 하얗다..."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안되겠지, 싶어서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윤기를 흔들었다.


"윤기씨, 일어나세요."


아무리 흔들어도 답이 없길래 연이어 윤기씨, 라고 불렀더니 곧이어 언뜻 눈을 떠온다. 눈이 부신 것인지 아니면 그저 잠을 방해받아 기분이 나쁜 것인지 미묘하게 눈썹을 치켜올린 그는 순간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판가름을 못하는 것 같아 보이더니 이내 어깨에 올라와있는 손이 지민의 것이라는 걸 깨닫고 그대로 눈을 떴다.


"...뭐야."

"그게...사장님이 청소하라고 보내셔서...왔는데요."


청소? 그 말 한마디에 상체를 일으키더니 뒷머리를 긁었다. 한숨을 내뱉더니 곧이어 지민에게는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그 개새끼를 갖다가, 라고 중얼거리더니 시선을 방 안으로 돌렸다. 생각보다 훨씬 깔끔해진 내부에 놀라기도 잠시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언제 온거야."

"아...저도 잘은 기억 안 나는데. 한 10시쯤?"


일찍도 왔네. 썩 달갑지는 않았는지 조금은 화난 말투로 말한 윤기는 뒤이어 몸을 일으켰다.


"일 다 끝났으면 가지?"

"아...그게요..."

"왜. 더 남았어?"


그건 아니고. 웅얼거리며 말하자 윤기는 이미 방 밖으로 나간 후였다. 황급히 쫓아나가자 들려오는 말은 딱 한마디.


"씻을 거야."

"...네?"


아...네...곤란한 표정으로 잠시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내렸다. 더 할 것도 없는데 이상하게 더 남아있고 싶었다. 씻겠다고 하는 말에도 수긍하지 않는 것인지 자꾸만 망설이는 마음을 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런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가지 않고 욕실 앞에 서있는 지민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윤기는 조금 고민하는가 싶더니 말을 이었다.


"밥은."

"네?"

"밥 먹었냐고."

"공복인데요..."


그 말도 심기를 건드린 것인지 또 불쾌한 표정으로 바뀌기는 금방이었다.


"이때까지 뭘 했는데."


윤기씨 집 치웠어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것을 간신히 꾹 눌러참았다.


"너 밥이라면 사족을 못 쓰잖아."


당연하다는 듯이 말해오는 윤기에 마음 속에 무거운 돌을 쿵하고 얹어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밥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니, 대체 어떤 모습으로 평소에 찍혀있던 거야? 그 생각을 하니 이상하게 눈물이 핑 돌았지만 불평할 시간도 없었다. 윤기의 일정에 맞춰서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면 배가 안 고플래야 안 고플수가 없으니까.


오히려 그런 일정들을 전부 소화해 나가면서 배가 고프지도 않다고 샐러드 마저 마다하는 그가 더 이상한 쪽이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윤기의 눈에 지민은 그저 밥 잘 먹는 매니저일 뿐이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애매한 관계.


"괜찮아요, 저 배 안 고파요."

"배가 안 고프다고? 네가?"

"네, 저 진짜로 배가 안 고ㅍ..."


환하게 웃으면서 말을 하는데 이런. 타이밍은 왜 언제나 이렇게 지민을 괴롭히는 것인지. 때마침 요란하게도 배꼽시계가 울렸다. 배고프지 않다고 말하려고 했던 입을 그대로 꾹 다물고 순간 화끈거리는 얼굴을 푹 내려버린 지민은 아무 말두 없는 윤기 탓에 더 부끄러워져만 갔다.


"배. 안 고프다며."

"......"


낮은 저음으로 물어오더니 지민이 아무 대답이 없자 윤기는 뒤이어 말했다.


"너한테 뭘 바라냐. 앉아있어. 금방 씻고 나올테니까."


평소보다 상기된 목소리에 네? 라고 반문하며 고개를 들자 놀랍게도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있다. 무슨 뜻이냐고 묻기도 전에 욕실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기에 그대로 그 자리에 벙쪄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나한테 웃어주는 거..."


처음봤어. 그렇게 중얼거리며 입을 틀어막기도 잠시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고 괜시리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아니, 웃어준 걸 가지고 왜 얼굴이 빨개지는데 박지민? 스스로 물어봐도 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 괜히 더 그랬다.


윤기가 씻고 나올 때까지 얌전히 소파에 앉아 기다리던 지민은 채 10분도 되지 않아 새로 갈아입은 옷을 입고 나온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어어...그러니까..."

"뭐 먹고싶은 거 있어?"

"네?"

"집청소도 해줬고. 때마침 나도 공복이고. 네 몸은 배고프다고 난리 치던데?"


노골적으로 놀리는 듯한 말투에 고개만 푹 내렸다.


"농담이고."

"아..."

"진짜 뭘 먹고 싶은데."


네? 질문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해서 되묻자 답답한지 윤기는 한숨과 함께 다시 물어왔다.


"같이 밥먹자고. 사줄테니까."

"...진짜요?"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해? 내가 너냐?"

"저 거짓말 한 적 없는데요..."

"거짓말 비슷한 건 잘 하잖아."

"없는데..."

"저번에도 키 가져왔다고 말하고서는 그대로 두고왔으면서."


아 그건요!!! 발끈해서 벌떡 일어나는 걸 보고 또 재밌다고 웃고 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려서 도저히 말할 상태가 아닌 것 같아 그대로 입을 다물었지만.


"윤기씨 진짜 짖궂은 거 아세요?"

"내가?"

"네."


그는 피실 웃더니 가볍게 무시했다. 그 태도도 상당히 짜증났지만 그렇다고 마냥 싫은 느낌도 아니라서. 가만히 보고 있다가 그제서야 깨달았다.


"사복..."

"어?"


말하고 나서야 입밖으로 나왔다는 걸 깨닫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두 손을 흔들었지만. 그러고보니 평소 입던 트레이닝복이나 폴라티와는 달리 검정 무지티에 평범한 반바지를 입은 그의 모습이 눈에 띄였다. 항상 보던 모습과는 다른 또다른 모습을 본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했지만. 가장 좋은 건 역시.


"아니면 밖에 나가서 먹던가."

"아, 아니에요! 그냥 간단하게 뭐 해먹어요."


이 모습을 매니저인 나밖에 볼 수 없다는 건가. 말하자면 독점. 혼자 생각하다가 이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깨닫고 미쳤다 싶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본인도 알 틈이 없었다. 다행히 그저 지민에게는 한없이 관심이 없는 윤기에게 고마워질 뿐이었다.


혹시 나 윤기씨를 좋아하나?


말도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괜스레 고개를 들어 부엌 쪽에 있는 검은 머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JM BOTTOM/ONLY SUJ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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