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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 로테이션 07

"여권은."

"여기 있어요."

"티켓은."

"티켓은 여기...어?"

"......"

"잠시만요, 어..."

"......"

"어떡해요!!! 저 티켓이 없어졌어요!!!"


공항 전체에 지민의 울먹거리는 외침이 울렸다. 지나가던 외국인들이 눈을 돌리기도 잠시 제 일이 아니라는듯 휙 돌아가버리는 그들의 시선에 신경쓸 겨를도 없었다. 이미 수하물들을 맡겨버려서 확인해 볼만한 것은 조그마한 가방 뿐인데 그 안에는 여권만이 있을 뿐 다른 어느 것도 없었기에 티켓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미쳤지, 박지민. 벌써 티켓을 잃어버린거야? 곧 있으면 탑승수속 밟아야 되는데. 울먹거리고있는 지민을 보던 윤기의 입가에 피식, 얇은 웃음이 띄어졌다.


"바보냐, 진짜."

"네...?"

"티켓. 아직 안 줬어."

"...네?"

"너 그럴까봐 안 줬다고."


한 손에 들린 지민의 티켓을 유유히 들고있는 그가 왠지 오늘만큼은 미워 보였다. 입술만 삐죽 내밀고 휙 낚아채는데 속아 넘긴 게 재밌던 것인지 아니면 속아 넘어간 지민의 반응이 재밌는 것인지 알 턱이 없었다. 곧 있으면 일본행 비행기를 타야할 예정이었다. 어차피 전지 훈련이지만.


언제 일주일이 다가나 싶었는데 금세 다가온 월요일은 일본으로 떠나는 것이 진실이라고 알려주기라도 하듯 아침 일찍부터 공항에 다달아 있었다. 일주일도 채 안되는 일정이라 많은 짐들도 필요 없었기에 윤기의 스케이트 용품들과 갈아입을 옷 몇 가지들만 챙겨들고 와서 정작 짐이랄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거의 처음 나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여행이 지민은 어딘가 모르게 설렜다. 같이 가는 쪽이 윤기라서 더 그랬고. 그렇다고 감정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외국으로 가게 되어서 기쁘고 설렌다는 느낌만 해도 그랬다. 저번에 단호하게 여행가는 것이 아니라는 면박을 듣고 나서는 그에 관한 말은 단 한마디도 입밖으로 내뱉은 적이 없으니까.


비행기에 탑승하는 게 익숙한 윤기와는 달리 모든 게 처음이나 마찬가지인 지민은 마냥 신이 났다. 탑승 수속을 밟는 것도 그렇고, 비행기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도 그렇고. 게다가 가장 놀란 것은,


"헐, 저희 비즈니스석 타요?"


호들갑을 떠는 지민을 흘긋 보다가 그대로 무시해버린 윤기는 말없이 먼저 앞을 향해 나아갔다. 일반석이라면, 몇 번 타봤지만 비즈니스석은 처음이었기에 괜스레 두근거렸다.


"비즈니스랑 이코노미랑 뭐가 다른데."

"네?"

"이코노미는."


안 가봐서 몰라. 무심하게 말하면서 자리에 앉는 그였지만 그 말을 듣고 어이 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린 지민은 한껏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와. 방금 엄청 재수 없어 보였던 거 알아요?"

"몰라."


입가에 그대로 웃음을 띄며 윤기의 옆자리에 앉은 지민은 푹신한 의자에 감탄하는듯 하다가도 부드러운 느낌이 좋은지 이내 두 눈을 감았다. 앉자마자 쓰고있던 볼캡을 벗고 가방 안으로 던져버리고 잠을 자겠다며 눈을 감아버린 윤기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지만.


사실 비행기에 탄 이후로부터 윤기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비행기를 탔다는 기쁨이 더 컸기 때문일까. 이륙한다는 말이 들리고 한참 동안이나 지민은 쉽사리 잠에 빠져들지 못했다.



-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향한 곳은 연습장. 한국의 빙상장과 이곳의 빙상장의 다른점을 찾기란 어려웠다. 솔직히 말해 일본 말이 들리는 것 외에는 다른 접점을 찾지 못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몽롱한 상태의 지민을 거의 끌고가다시피 차에 태우고서 연습장으로 곧장 향하던 윤기에게 핀잔을 들었다.


비행기 안에서 좀 자두라고 그렇게 말했더니 말을 안 듣는다고. 그럼 어떡해. 설레는 걸. 변명하고 싶었지만 보나마나 또다시 뭐라 들을 것이 뻔해서 입만 꾹 다물고 죄송하다고 사과만 연달아 말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저번처럼 쓸모 없다느니 그런 말들은 하지 않는다는 점.


그에 대해서도 기쁘다고 표출했더니 돌아오는 말은 쌀쌀맞고 짖궂었다. 차마 일본에서 쫓아내기에는 제대로 집을 못 찾아갈 것 같으니 봐주겠다는 게 이유였다. 확실히 자두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비행기가 착륙할 때 쯤에서야 눈을 조금 붙였으니 사실 한숨도 못 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고작 2시간 남짓되는 비행 시간 동안 그다지 많이 잔 것도 아니면서 연습할 때만큼은 윤기의 눈은 반짝였다. 벤치에 앉아 턱을 괴고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면 지치지도 않나, 싶으면서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얼음이 좋을까?"


물어봤자 대답없는 질문이었지만. 제대로 물어봤다가는 대답도 못듣고 노려보는 시선을 견뎌야만 했을 것이다. 이상하게 지난번 이후로부터 연습장 안에만 들어갔다 하면 져지를 벗어주는 그 덕분에 지금도 반팔 위에 져지 차림이지만.


얇은 폴라티를 입고 빙상 위에 서있는 그 모습을 보고있자니 괜시리 미안해졌다. 나중에 따듯한 거라도 사올까, 지금은 다이어트 기간 아니겠지? 조금 있으면 얼음을 청소해야 한다고 잠시동안의 휴식 시간이니 그동안 뭐라도 조금 영양보충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막상 근처에 살만한 곳은 조그마한 마트밖에 없었지만. 생각이 거기까지 솟아오르자 당장 실행해야겠다는 마음밖에 없었다. 지갑을 들고서는 쫄레쫄레 연습장 밖으로 나왔다. 마트까지의 거리가 조금도 아니었기에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뛰어갔다 오느라 어느새 땀은 가득했지만 별로 상관 없었다. 한 손에 든 따듯한 차가 마음까지 간질거리게 만들었다. 윤기씨 좋아해주면 좋겠다, 지금은 이 생각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다 돌아오는 길에 무언가를 마주쳤다.


"어...?"


벽에 붙은 포스터. 여기가 자주 외국인들이 이용하는 연습장이라는 것을 알아서인지 일본어로 적힌 포스터 밑에는 깨알같이 영어와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었다. 적힌 글자는 간단했다. '마을 불꽃 축제'. 문제는 그걸 받아들이는 지민의 마음이 간단하지 않았다는 것이지.


"와..."


마을 축제라. 그것도 불꽃 축제라니. 솔직히 말해 일본의 축제가 유명한 것은 사실이었다. 지민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고. 갈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가보고 싶었지만 오늘이라고 적힌 날짜를 보니 무리겠구나 싶었다. 게다가 연습 첫날부터 윤기가 쉬리라고는 있을수도 없는 일이니까.


괜한 기대는 접는 편이 빠르다고 무용을 하면서 생각했다. 무용을 하면서 처음 다쳤을 때도 그런 생각을 했고 마지막으로 부상을 당해 더이상 무용을 하기 힘든 몸이 되었을 때 줄곧 입었던 트레이닝 복을 버릴 때도 그랬다. 쓸데없는 기대는 사람으로 하여금 바보로 만든다는 사실을 너무 일찍 깨달아 버린 것만 같았다.


윤기에게 무리해서 연습을 빼라던가, 축제에 가고 싶다거나 말하고 싶지 않았다. 진지하게 매니저로서 여기에 온 것이고 결코 그의 말처럼 놀러온 게 아니라는 것쯤은 증명해내고 싶었으니 이 정도의 인내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뭐해."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그대로 소리를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왜 놀라는데."

"아니...갑자기 튀어나오니까..."


놀랐죠. 뒤를 돌아보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익숙한 윤기의 모습에 조금이나마 안도했지만 아직도 콩닥콩닥 놀란 가슴은 가라앉을 줄을 모르는 것만 같았다. 그 새 연습이 끝났는지 목에 두른 수건으로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던 그는 지민을 내려다보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갑자기 튀어나온 건 아닌데."

"네...?"

"아까부터 여기 있었다고. 너 여기 서있을 때부터."

"아니...! 그러면 말을 했어야죠."


발끈해서 화를 내다가도 무표정으로 바라보는 윤기의 표정에 애꿎은 입술만 꾹꾹 씹었다.


"...이거나 드세요."

"뭔데."

"따뜻한 차요."


건네는 손길에 뭔가 싶다가도 받아들고 나니 전해지는 온기에 미묘하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눈만 데굴데굴 굴리면서 바닥만 응시하길래 왜 내 쪽은 보지 않냐고 말하려다 관뒀다. 괜히 또 강요하는 것 같아서. 저번날처럼 우는 얼굴은 왠지 보고싶지 않았다.


우는 걸 보면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났다. 그 이유가 뭔지도 잘 모르겠지만. 남이 우는 건 불쾌했다. 그 이유가 자신이라면 더더욱. 윤기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같은 상황에 처했더라도 마찬가지겠지만. 때마침 목도 말랐기에 뚜껑을 따서 입으로 천천히 들이키는데 순간 벽에 붙은 포스터에 시선이 갔다.


마을 축제? 평소라면 관심도 없었을 대목에 이상하게 관심이 갔다. 귀여운 것이나 아기자기한 것이면 차를 타다가도 창 밖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지민의 성격상 왜 그 포스터를 보고 있는지 대충 이해는 갔지만. 그런 것과는 살면서 한번도 연관된 적이 없는 윤기로서는 알기 힘든 부분이었다.


흘긋 보다가 이때쯤 되면 청소도 끝났겠다 싶어 발걸음을 돌렸다. 몇 걸음 나아갔는데도 뒤에서 따라오는 기미가 안 보이자 잠시 고개를 돌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직도 포스터 앞에 멈춰서서는 따라오지도 않는 지민이 두 눈에 들어왔다.


"빨리와."

"앗, 네!"


짜증섞인 목소리로 부르자 그제서야 총총 뛰어오는 것을 보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자나깨나 뇌구조 하나는 단순한 녀석이었다.



-



늦은 시간인만큼 다른 스케이터들은 연습장 밖을 하나둘 나가고 있는 가운데 덩그러니 지민과 윤기만이 허공을 채우고 있었다. 가끔가다 링 밖으로 나온 그에게 이온 음료와 보송보송한 수건을 건네주며 벤치까지 따라가 준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변화도 없는 똑같은 길들만이 반복되고 있었다.


조금의 달라진 점이라고는 윤기의 매니저가 되고 나서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피겨에 대해서 공부했던 보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하늘로 날아오르거나 얼음을 가르면서 링 위를 활보할 때 어느 것이 어떤 기술이고 무엇을 위해 어필하고 있다는 것 쯤은 대충이나마 해석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매니저로서 한 보 진전했다고, 일단 그렇게 생각해둘까. 만족할만큼 입 밖으로 기술명이 튀어나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처음에 보며 그냥 춤추는 거 아니야? 라고 생각했던 무식한 과거와는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그 점에 초점을 맞춰두기로 마음 먹었다.


"이거 끝나면 호텔로 가고, 아직 윤기씨 저녁 안 먹었으니까...호텔측 뷔페 이용하도록 할까."


나도 먹어야 하고. 그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노트에 식단이나 일정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일어나."


고개를 들어보자 앞머리에서 땀이 뚝뚝 떨어지면서도 지민을 지그시 바라보는 윤기가 서있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싶어서 시계를 바라봤지만 방금 전 다시 연습을 하러 올라갔을 때의 시간과 비교해서 30분도 채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뭔가 착각이라도 했나 싶었다.


"저어, 윤기씨. 아직 7시30분인데요?"

"알아."


아니 알면 왜 나온거야? 예상치도 못한 대답에 눈만 껌뻑거리고 있자 가만히 쳐다보고있던 그의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못들었어? 일어나라고."


그 말에 황급히 엉덩이를 의자에서 뗀 지민은 윤기에게 어서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 손짓에 질렸다는듯 피식 웃으며 한숨을 내쉰 그는 됐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앉으려고 나한테 일어서라고 그런 게 아닌가, 싶으면서도 의도를 알 수 없는 웃음에 괜히 마음만 더 싱숭생숭했다.


"샤워 간단하게 하고 올테니까. 밖에서 기다리던지 아니면 입구에서 기다리던지 해."

"네...?"


의아함이 가득 담긴 지민의 반문을 듣고서 나가려던 윤기는 목에 걸친 수건을 그대로 지민에게 던지며 한마디 내뱉었다.


"마을 축제 가고싶다며."

JM BOTTOM/ONLY SUJ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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