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오버 로테이션 10

윤기가 지민에게 충동적으로 자신의 안무를 짜라고 말한지도 어언 3일. 며칠 내내 지민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그 한마디의 힘과는 달리 둘 사이의 오가는 말은 되려 줄었다. 진전이 있을 줄 알았다면 착각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안무에 대한 말을 한번도 언급 하지 않았고, 지민도 굳이 그러려고 애쓰지 않았다.


이유가 있냐고 묻는다면 윤기가 충동적으로 말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그의 성격이 그러한 것은 예전부터 잘 알고있었다. 무엇이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겉으로 티를 내고 잘 숨기지 못하는 사람. 그러면서도 언제나 충동적으로 무언가를 결정하고 행동대로 옮겨버리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지민이 아는 민윤기였다. 괜스레 또 안무에 대한 말을 꺼냈다가 괜히 지민에게 안무를 짜라고 했나 후회하는 표정이 그의 얼굴에 내비칠까봐 먼저 말을 삼가고 있었다. 윤기는 생각보다 훨씬 자상한 사람이었다. 안무에 대해 서로 말이 없다고 했지, 지민이 전혀 안무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고 놀고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오랜만에 움직이는 몸이다보니 훨씬 뻣뻣했고 그 과정을 지켜보던 윤기가 가끔 와서 몸을 풀어주거나 동작들을 다시 잡아줄 뿐. 그 이상의 무언가는 없었다. 그 편이 오히려 지민도 편했고. 연습장 내부의 공기는 그 날 밤의 일을 모르는듯 고요하기만 했다.


이따금 연습을 끝내고 땀을 흘리며 이온 음료를 달라는 손에 그대로 병을 건네주었고, 땀이 나서 수건을 건네주는 것 외에 둘에게 오가는 말은 없었다. 평소와 다름 없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윤기가 더 신경쓰였다. 눈에 밟혔다.


무용에 대한 후회감이나 그리움이 있다는 것은 지민 쪽에서도 어느정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돈 벌기가 더 급급했고, 매니저 일을 하며 무용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기에. 과학을 전공한 것도, 수학을 전공한 것도 아닌데.


지민의 머릿속에서는 어느 순간 동화가 덧없는 꿈일 뿐이라는 사실이 틀어박혀있었다. 그런 생각을 고맙게도 깨부수고 새로운 기회를 준 쪽이 다름아닌 자신의 짝사랑 상대, 윤기라는 사실이 마냥 좋았고, 마냥 고맙고, 마냥 행복했다. 물론 그저 같은 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지민의 입장이 이해가서 나온 말이겠지만.


그러면 어떠랴. 그저 좋기만 했다. 그가 걱정하는 부분이 애인으로서도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으로서도 아니더라도 그저 '지민'에 대한 걱정이라면 다 좋았다. 적어도 그 부분으로 걱정은 해주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무용을 욕심 부리다가 그렇게 처참히 실패한 만큼, 윤기에게 더 많은 것을 바라고 욕심을 부리고 싶지는 않았다.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금 하고있던 턴을 다 돌고서 멈춰섰다. 여전히 하얀 피부에 여전히 잘 어울리는 검정 폴라티. 한 번 빙상 위에서 날아오르다가 안정적으로 착지하는 모습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빤히 바라보게 됐다. 그러다가 시선이 한 번 공중에서 맞닥뜨렸는데도 불구하고 지민은 윤기를 바라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굳이 윤기 쪽에서도 멈출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평소와 달리 지민의 눈이 깊다. 원래 저렇게 새까만 눈이었나. 의아한 느낌이 들었지만 신경쓸 겨를은 없었다. 지금은 연습이 더 중요했다. 그걸 아는데, 충분히 아는데.


젠장. 그만 정신을 놓고 있다가 단숨에 자세가 흐뜨러지고 그대로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퍽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손을 짚으며 얼음 위로 넘어진 윤기는 스스로도 어이 없어서 피실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박지민 본다고 정신 놨어...?"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그런 일은 있으면 안되는 것이었고, 없기를 바랐다. 눈을 서로 마주보고 있던 터라 윤기가 넘어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근처로 금세 달려온 지민은 빙상 밖에서 입가에 손을 얹고서 소리쳤다.


"안 다쳤어요?"

"......"


자기 때문에 다쳤는데 알기나 할까. 알았다가는 저 녀석, 무슨 표정을 지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다는 것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 일어서다 말고 스스로의 입을 틀어막았다. 덥지도 않은데 식은땀이 흘렀다. 왜이래, 왜이러냐. 민윤기.



-



"오늘 저녁 뭐 먹죠? 어제 저희 초밥 먹었으니까...오늘은 라멘으로 할까요?"


대답을 하지도 않았는데 덧붙여서 '저 일본식 라멘 진짜 먹어보고 싶었어요.'라고 말하는 지민을 흘긋 쳐다봤다. 잔뜩 신난 눈치다. 내가 안 가자고 하면 어쩌려고 저런 표정을 지어. 어차피 모든 일들은 지민의 소원대로 되게 되어있다는 것을 알아서 그런가, 더 얄미웠다.


음식에 대해 그다지 호불호도 없고 애초에 무언가를 먹고 싶은 욕구가 그렇게 강하지 않은 터라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이라면 스테이크도 좋고, 편의점 삼각김밥도 좋았다. 그 정도는 갭차이가 너무 심한 거 아니냐고 투덜거리던 지민의 말이 귓가 언저리에 울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가치관 자체가 그런 걸 뭐 어쩌라고.


그래서인가. 일본에 온 이후로 지민이 먹고 싶다는 가게는 죄다 가봤다. 초밥부터 시작해서 편의점 음식까지 섭렵하고서는 아직도 모자란지 오늘 저녁에는 라멘을 먹자고 하는 녀석이 눈에 좋게 보일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의견을 제시하기에는 일본의 음식 자체를 잘 모르기도 했고 잘못했다가는 가격 바가지를 쓸 것 같아서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평소에 자동차 열쇠를 어디 놔뒀는지 까먹기 일쑤에다가, 틈만 나면 호텔 방 키를 잃어버려 돈으로 변상하기 바쁜 지민이 유독 음식에 관해 도가 트여있는 것을 보면 신기했다. 일본에는 전지 훈련 때문에 제법 오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연습장 주변 음식을 줄줄이 꾀고있는 지민을 보자니 헛웃음만 나왔다.


언제였을까. 그에게 어떻게 음식의 가격이며 이 가게가 바가지를 씌우는 것인지 아닌지 조차 잘 판단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당연하다는 듯이 우기는 지민의 표정 때문인지 아니면 그 날 그 음식이 유독 맛있어서인지 이유야 어찌됐든 까먹어 버렸지만.


솔직히 말해 상관없었다. 저렴하고 맛있게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면 그 점에 만족이니까.


"라멘, 괜찮아요?"


이미 다 정해놨으면서 괜히 또 물어왔다. 한숨을 내쉬고서는 한마디 똑바로 내뱉었다.


"어차피 먹을 거잖아."


단호한 한 마디에 찔렸는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는 것을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답은 안 들어도 뻔했다. 사실, 지민의 걸음은 이미 라멘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별말이 없다는 것은 윤기가 동의한다는 뜻이므로. 굳이 다르게 해석할 필요가 있나?


그 상황에서 다른 말을 했다가는 상황이 어색해질 것만 같아 애써 웃음으로 얼버무리고서는 먼저 앞장섰다. 그런 지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뒤따라오는 윤기의 표정은 마냥 불편해보일 뿐이었다. 사실, 속마음을 들여다 보자면 불편한 것만은 아니고. 항상 무엇이든 선두로 섰던 자신이 누군가를 따라간다는 사실이 불쾌하다는 마음이 더 컸다.


그런 사실을 지민이 알 턱이 없었다. 윤기 쪽에서도 강조하고 싶은 사실은 아니었고.


"여기에요! 와, 진짜 크다."


라멘집은 보통 작은 경우가 대부분인데 큰 빌딩의 한 층 전체가 라멘집이니 큰 편이었다. 일본에 대해서 가장 기대되는 부분은 딱 두가지였다. 스시와 라멘. 물론 마을축제도 거기에 한 몫을 했지만. 스시와 마을 축제를 클리어 했으니 지민의 마지막 목표는.


"라멘이다!"


그랬다. 그게 끝이었다. 무슨 미션이라도 잡아놓은듯한 지민의 태도에 한숨을 내쉬다가도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그를 따라 들어가는 윤기는 알다가도 모를 그런 기대감. 애초에 음식에 대한 기대라니. 윤기에게는 있을 수 없는 요소였다.


그래서인가. 이상하게 지민을 따라나서면 재밌는 볼거리가 많았다. 아 물론, 말 그대로의 재밌는 것 말고. 우스꽝 스럽다거나. 예를 들어서 지금 이 상황.


"엄마야...!!!"


라멘을 시켜놓고서는 오늘은 안 덜렁거리나 싶던 지민이 그대로 들고있던 간장 통을 옷 위에 쏟았다. 비명소리가 들리고 옆에 있던 직원이 당황하며 물수건을 갖다줬지만 역부족인듯 싶었다. 이런 상황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웃고있는 사람은 윤기 외에 아무도 없었다.


"왜 웃어요!!!"


웃는게 억울하기라도 하다는듯 칭얼거리며 말하는 말투에 피식 웃었다. 오늘은 웬일로 얌전히 넘어가나 싶었더니 마지막에 가서야 재밌는 볼거리를 선사했다. 지민은 언제나 그런 아이였다.


"아 진짜...이럴 줄 알았으면 흰 티 안 입는건데..."


입술을 삐죽 내밀고 애꿎은 티셔츠만 바라보는 지민을 보다가 먼저 라멘 한 젓가락을 입으로 넣었다. 물 수건으로 임시 방편이라도 취하는지 꾹꾹 누르던 지민은 그의 젓가락질을 보다가 떡하니 입을 벌렸다. 아니, 사람이 이렇게 큰 재난을 겪고 있는데 어? 밥이 넘어가?


그런 지민의 표정을 읽기라도 했는지 미묘하게 미간을 구긴 윤기가 입을 열었다.


"내가 네 티셔츠에 간장 좀 튀었다고 왜 밥을 안 먹어야 하는데. 게다가 라멘은,"


불잖아. 어깨까지 으쓱하며 말하는 태도에 질렸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무시했단 말이지, 지금? 그렇다고 따질 수도 없었다. 합당한 말이었으니까. 라멘은 오래 놔뒀다가는 부는 음식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안 먹고 있는데 자기는 먹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상대가 윤기라서 참기로 했다. 하필이면 간장 통을 엎어서. 아끼는 티셔츠였는데. 중얼거리다가도 이래봤자 소용 없다는 사실을 알아서인지 입만 꾹 다물게 됐다. 이제 못입겠지, 이 티셔츠.


"넌 다른 옷도 없냐?"

"네?"

"맨날 그 옷 입잖아."


제가요? 의아한듯 되물었지만 그랬다고 긍정하듯 노려보는 눈빛에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보니 일본에 와서도 그렇고 한국에서도 대부분 이 옷만 입고 생활한 것 같기도. 아니, 같은 게 아니라 그랬다. 정확히 윤기의 말이 맞았다. 오죽했으면 그런 것에 관심도 없는 그로부터 그런 말이 나왔을까.


경악 그 자체였다. 일본에 온 후부터는 대부분 이 옷만 입고있었으니. 괜스레 창피한 감정이 뒤늦게 몰려와서 붉어진 얼굴만 아래로 푹 수그렸다.


"왜."

"그, 그냥...창피해서..."


지민의 낯부끄러운 대답에 얼굴만 가만히 쳐다보다가 그는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이상하게 그토록 기대했던 라멘인데. 입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다 먹고 계산하는 순간까지.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



아, 이런 옷 입고 돌아다니기 싫은데. 무심결에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말을 속에서 삭혔다. 그도 그랬다. 누가 봐도 간장 묻었어요, 라고 티내는 티셔츠를 입고 거리 한복판을 돌아다니고 있었으니까. 오다가다 한번쯤은 흘긋 지민의 티셔츠를 보는 외국인의 시선은 덤이었다.


게다가 색깔만 그렇다면 상관 없는데 아까부터 왠지 모르게 짠 냄새가 올라오는 느낌이라 기분이 영 마음에 안 들었다. 옷을 꽉 묶어서 얼룩 부분을 가려보기도 하고, 냄새가 안 나도록 손으로 막아보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던 터라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는 지민을 힐끔 그가 쳐다봤다.


윤기씨한테 점수 엄청 깎였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속이 더 아팠다. 가뜩이나 철없고 덜렁거리는 애로 찍혀있는데. 싫었다. 언제까지고 아이로 남아있을수도 없는데. 하긴, 어른으로 찍힌들 이번에는 그 방향대로 고역이겠지만.


티셔츠로만 눈길이 가던 찰나에 갑자기 뒤에서 훅 당기는 손에 컥하고 숨이 막혔다. 뭐야, 납치범? 깜짝 놀라서 뒤돌자마자 멈춰서있는 윤기와 시선이 마주쳤다. 어깨를 잡고있는 손도 그의 것이었다.


"아 진짜...!!! 사람 놀라게..."


안도의 한숨이고 뭐고 할 것 없이 화부터 벌컥 내던 지민은 그에게 왜 붙잡았느냐고 이유를 물었다.


"옷."

"네?"

"그거 입고 숙소까지 돌아가게?"

"아..."

"알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우리 오늘 묵는 곳, 5성급 호텔이거든."


그 차림으로 가는 거 좀 창피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당연한 질문이었지만 괜히 상기시켜줬다는 생각에 눈만 질끈 감았다. 알아요, 나도 안다고요. 그러면 어쩌자는 건데요. 한마디 해주려던 찰나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 시선이 갔다.


백화점이었다.


"아니, 여긴 왜요...?"

"옷 안 사냐고."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지민의 손을 잡아 끌었다. 1층 여성 매장을 지나 2층의 남성 매장에 도착하더니 아직 놓지도 않은 손을 그렇게나 세게 잡고 어딘가로 가는 느낌이 마냥 싫지는 않아서 끌려 다니면서도 지민은 변명 하나 하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돌아다니고 나서야 특정 브랜드 앞에 멈춰선 그는 지민의 손을 놓았다.


"여기서 사."


뭘 또 사라고, 라고 중얼거리며 나가려던 참에 지민의 눈에 들어온 브랜드는 생각 외였다. 훨씬 깔끔한 스타일의 재단과 지민이 좋아하는 디자인들로 가득한 그런 브랜드.


"헐..."


사실 윤기가 찍었다 하면 백에 백이었다. 평소 입고 다니는 스타일하며, 딱보니 생각나는 브랜드는 이 곳밖에 없어서 무작정 들어왔던 참이었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생각보다 훨씬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아 괜히 안심했다. 사라는 말에 부정도 안하고 안으로 들어가는 녀석을 보다가 피실 웃었다.


[어서오세요, 손님.]


일본어로 말을 하다가도 이내 둘러보는 지민과 윤기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직원의 말투는 금세 한국어로 고쳐졌다.


"어서오세요,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오랜만에 듣는 모국어에 지민의 입꼬리가 살풋 올라갔다. 니트부터 시작해서 맨투맨, 롱 슬리브 티. 슬랙스, 청바지.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 중에 유독 눈에 띄는 검정색 니트를 골라 얼추 몸에 대봤다.


"한 번 입어보시겠어요?"


이상하게 그 말에 홀린듯이 피팅룸으로 향했다. 정말 정석대로 영업하는 미소였는데 평소라면 안사요, 하고 지나쳤을 가게가 윤기의 소개 탓인지 하루 쯤은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피팅룸에서 갈아입고 나와서 거울을 보자마자 연신 비명을 금치 못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지민의 스타일이었다. 딱 떨어지는 핏이며, 단순히 지민의 생각이었는지는 몰라도 마치 딱 자신을 위해서 만들어진 옷같았다. 한 번 보고 돌아서 한 번 보고 또 돌아서 한 번을 더 보고. 누가 봐도 노골적으로 마음에 든다는 행동을 취하고있는 지민을 보던 윤기는 나지막이 한마디 내뱉었다.


"마음에 들어?"

"네..."

"그럼 사."


윤기의 말에 입꼬리만 축 처졌다. 여기 브랜드 비싼데. 사실 여기 브랜드 뿐만 아니라 백화점에 입점되어있는 브랜드들은 고루고루 전부 비쌌다. 이 곳이 그 중 한군데일 뿐이지. 밑에 달린 가격표를 보다가 눈이 휘동그레졌다. 대체 0이 몇개야? 그걸 보다가 도저히 제 월급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옷 같아 입만 벙긋거렸다.


"아 역시...안 사는게...저 그냥...나중에 가는 길에 5000원짜리 티셔츠 한 장 사가면 돼요..."


더듬거리며 빨리 이 비싼 옷을 벗어야 겠다는 생각으로만 머릿속이 가득찬 지민은 헐레벌떡 피팅룸으로 향했다.


"마음에 들면 사라니까."

"아니..."

"마음에 들어?"

"네?"

"마음에 드냐고."

"아...네...마음에 들긴 한데요. 윤기씨, 이거 가격ㅇ..."

"계산해주세요."


지민의 말을 뚝 자르고 카운터 앞에 선 그는 정장 뒷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 직원에게 건넸다.


"지, 지금..."


뭐하는 거예요? 물을 틈도 없이 카드를 받아든 직원은 일시불로 할 거냐고 물었고 그 말에 윤기는 긍정했다. 벙찐 상태로 있을수도 없었기에 헐레벌떡 달려가서 말리려 했을 때는 이미 영수증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아..."


입꼬리가 한껏 내려갔다. 딱 윤기가 싫어하는 울 것 같은 강아지 표정. 가만히 쳐다보던 윤기의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왜 사줘도 지랄이야."

"아니...저...이거...엄청 비싼데..."

"내가 결제 하겠다는데. 내가 뭐 네 월급에서 까겠대?"

"아뇨...그게 아니라..."


그럼 됐으니까 나가. 지민의 등을 그대로 떠밀면서 영수증과 함께 아까 지민이 입었던 흰 티를 담은 쇼핑백을 손에 든 그는 브랜드 매장을 나섰다. 나서는 내내 역시 환불을 해야겠다는 둥 이건 좀 아니라는 둥 여러 소리를 지껄이길래 기어이 윤기가 짜증섞인 목소리로 한마디 내뱉었다.


"그만."

"그래도...이거 가격 얼만지는 알고 결제하신 거예요...?"

"대충 얼만지는 알아."

"아니...! 0이 진짜 많다니까요...!"

"그래서."


말이 도무지 통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냥 보너스라고 생각해. 너 일하고 나서 나 한번도 보너스 안 줬잖아."

"아...그래도...이건 진짜..."

"고마우면. 잘 입고 다니던가. 이제 그 놈의 흰 티 그만입고."

"......"


말없이 입만 꾹 다무는 지민을 보다가 갑자기 생각났는지 그는 말을 덧붙였다.


"그렇다고 그것만 매일 입고 오지는 마라."

"네..."


백화점을 나서는 두 사람의 걸음이 왠지 모르게 가벼웠다. 받으면 안된다는 걸 아는데도 괜스레 옷을 사준 그가 고맙고 무언가에 기대까지 하게 되는 것만 같아 속이 뜨거웠다. 쿵쿵, 심장이 고장난 것처럼 자꾸만 뛰었다. 정작 사준 쪽은 아무 감정도 없어보였지만.


검은 정장에 검정 셔츠. 오늘 컨벤션이 있다고 차려입고 나온 옷이 유독 눈에 띄었다. 흘긋 지민은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봤다. 검정 슬랙스에 검정 니트. 터무니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꼭 커플룩 같다고.


그를 바라보다가도 그대로 안겨버릴 것만 같아 괜스레 눈을 꾹 감았다. 그가 좋아도 너무 좋았다.

JM BOTTOM/ONLY SUJIM

짐데렐라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