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오버 로테이션 14

몸이 뜨거웠다. 뜨거워서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목이고, 몸이고, 성한 곳이라고는 아무 데도 없는 것만 같았다. 윤기에게 차이고서부터의 상태가 이상했다. 몸살이 난 것처럼 골골 앓기부터 시작해 감히 일어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자꾸만 재다이얼 기능이 있는 전화기처럼 그 순간이 떠올랐다.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고백이며 단번에 차여버린 상황까지. 후회하고자 하면 후회할 수 있었으나 주워담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집에 돌아온지는 한참이 지났는데 아까 차가운 밖에 오래 있어서 그런지 아무래도 감기에 걸린 것만 같았다.


밖은 이미 한참 어두어질대로 어두워졌고 갈아입지도 못한 옷이 걸리적 거렸다. 땀까지 나는 상태라서 감히 침대에서 나올 생각은 할수도 없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마른기침만 연신 나오는 상황에 괜스레 아무 잘못도 없는 윤기만 미워졌다.


일한 이후로부터는 한번도 아픈 적이 없었는데 그걸 청산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몸은 지랄맞게도 아파왔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었다. 희미해져가는 시선 속에 달달 떨리는 손으로 단축 번호 1번을 눌렀다.



-



"아이고, 이년아. 뭐가 좋다고 이런 날씨에 얇은 거 하나만 입고 밖에 나가."

"그냥..."


그냥 몸이 조금 안 좋다고 말했을 뿐인데. 집에 온 엄마는 양 손 가득 무언가를 잔뜩 싸들고 들어왔다. 무슨 짐을 그렇게 많이 가져왔냐고 물어볼 기운조차 없어서 축 처지는 앞머리만 거칠게 뒤로 넘기는데 엄마는 한숨만 푹푹 쉬어댈 뿐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아픈데 별 이유가 있나. 몸이 아프니까 아픈거지. 차마 그 말을 내뱉을 수도 없어서 입만 꾹 다물고 이불 안으로 몸을 욱여넣었다. 따듯했는데 이상하게 서늘한 기운이 가슴 속을 뚫고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차인 것은 윤기의 탓도 아니었고 지민의 탓도 아니었고 그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아는데도, 자꾸만 윤기가 미워졌다. 왜 거절했어요? 나는 왜 안돼요? 이기적이고도 말도 안되는 질문이라는 걸 아는데. 바보같다는 걸 아는데도 이상하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왜울어??? 너 진짜 많이 아픈거야?"

"...그런 거 아니야."


걱정해서 다가온 건데 어느새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미는 엄마를 밀어내고서 중얼거렸다. 성질 머리 하고는, 마음에 안 든다는듯 까칠한 목소리로 말하고서는 엄마는 이불을 끝까지 들어올려 목위로 덮어주었다. 그러고보니 자취 생활을 시작한 후로 엄마와 단 둘이 있게 된 적은 거의 처음이었다.


사실 어릴 때부터 엄마와 함께한 시간은 그다지 많은 편이 아니었다. 무용을 한다고 바빴던 게 가장 큰 이유였지만 같이 있지 않는 상황에 낯설다는 감정을 느끼지 않았으니까. 다시 말하자면 지민 쪽에서는 엄마와 같이 있지 않더라도 아쉬운 것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런 상황에, 아픈데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아닌 엄마를 불렀다. 피식 웃음이 나오는 상황이면서도 죽이나 끓여줄테니 먹으라고 툴툴거리며 말하는 엄마의 모습이 괜스레 고맙고 뭉클해져서 눈을 다시 꾹 감았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일어나라고 흔드는 손에 겨우겨우 눈을 떴다.


눈 앞에는 따끈한 죽 한 그릇이 놓여있었다. 고소하게 나는 냄새가 어딜 봐도 정성스레 끓인 죽이었다.


"입맛 별로 없는데..."

"왜 입맛이 없어. 아파도 맨날 밥은 잘먹던 녀석이?"

"그냥..."

"너 혹시 누구한테 차였냐?"

"......"


장난으로 말하려는듯 웃으면서 약올리는 엄마의 말투에 문득 죽을 떠올리던 숟가락이 허공에 멈췄다. 아무 대답도 없고 반응도 없이 그대로 죽그릇만 쳐다보는 지민을 보자 순간 말을 잘못했나 싶어 황급히 입을 막았으나 돌이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긴, 알 턱이 없었다. 진짜로 차였을 줄은.


"진짜 차였어?"

"아니...그냥..."


아무일도 아니라고 대답하려고 했는데. 그대로 입은 꾹 닫혔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상하게 입은 움직이지를 않았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런 상황에 말만 더 꺼내봤자 상대가 누구냐느니, 저번에 말한 민윤기냐느니. 대답하고 싶지도 않은 질문들이 쏟아질 게 뻔했다.


그런 식으로 마음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저 나만. 나만 알고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의아하게 '좋아한다'라는 감정은 참 싱숭생숭해서 한껏 마음을 들뜨게 했다가 푹 가라앉게 만드는 것이 꼭 짝사랑하는 그 상대와 닮았다.


지금은 기분이 축 처져있는 상태였다. 아무와도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의 눈을 차마 마주치지도 못하고 다시금 죽을 떠서 힘없이 입안에 쑤셔넣었다. 분명 간은 되어있는데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찌보면 그저 느끼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만 먹을래."


반도 채 먹지 못하고 숟가락을 내려놓자 미쳤냐는 말부터 귀에 들려왔지만 솔직히 말해 먹을 정신이 없었다. 이대로 들이켰다가는 올곧게 다 토해내버릴 것만 같았다. 차라리 그럴 바에야 먹지 않는 게 나았다. 죽그릇을 침대 옆 협탁에 내려놓고는 아무 인사도 없이 돌아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다시금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그냥 차인 것 뿐인데. 인생에서 이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 많았던 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견디기 버거웠다.


"왜. 그 민윤기라는 사람 때문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아무것도 아니긴. 죽그릇을 들고서 방을 나가는 내내 엄마의 말투에는 왠지 모르게 가시가 박혀있었다. 그에 대한 대응을 할 기운조차 없어서 입을 다물었지만 평범한 상태였다면 다름없이 말대답을 하고서 싸움으로 번졌을 것이 뻔한 일이었다.


관두기로 했다. 괜한 말을 꺼냈다가 또 다른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았다.


"지민아."

"어...?"


엄마의 목소리가 어쩐지 다정했다. 평소라면 어림도 없는 일인데. 이상하다 싶어 눈만 살짝 내밀자 눈앞에는 거짓말처럼 밝은 미소가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는 언제나 네 편인 거 알지?"


괜스레 마음이 뭉클했다.



-



머리가 복잡했다. 집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지친듯이 들고있던 핸드폰을 신발장 위로 던져버리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까, 아까 그 순간부터. 솔직히 말해서 지민의 고백은 생각 외였다.


아니, 생각 외였다기 보다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박지민이 나를 좋아해? 평소라면 물어보지도 않았을 질문들이 머릿속을 마구 헤집고 있었다. 지민은 언제나 밝고 잘 웃는 아이였기에 누구나에게 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실제로 그랬다.


남을 대하는 게 서툰 윤기와는 달랐다.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거는데 수줍게 웃는 얼굴도 그렇고 나중에는 완전히 친밀감에 녹아들어서는 같이 웃는 모습도 그랬다. 그런 지민으로부터의 고백이라니. 좋아한다고 수줍게 외치던 지민의 볼은 생각보다 상기되어 있었다.


아마 많은 고민을 하고 말했겠지. 아마 수없이 망설였겠지. 그런 점들을 알면서도 거절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확실히 말해 지민을 좋아한다는 확증도 없었고 더군다나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도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 애매한 마음으로 희망 고문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래서 좋아한다는 눈치가 보이거나 사적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가차없이 매니저 자격을 박탈시켰던 건데. 이상하게 지민만큼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지금에서도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어찌 됐던 간에 그랬다. 이미 일은 벌어져있었고 바라는 것은 단 한가지 이것이 더 큰 사건으로 번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저 변덕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도시락을 싸다 주는 것도 그렇고 중간 중간 어떤 말을 해줘도 해맑게 웃는 모습이며 같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던 그 모든 것들 까지도. 알았더라면 무슨 반응을 보였을까. 지민이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지금 모습은 어땠을까.


과연 지민을 잘랐을까? 그 물음에 문득 냉장고에서 냉수를 꺼내 들이키려던 손이 우뚝 멈췄다. 그러고보니 이상하고 묘하리만큼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었다. 왜? 어째서? 수없이 반복되는 사슬같은 연속적인 질문을 던져봐도 답은 나오지를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까.


지금까지 매니저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자를지를 먼저 생각했다. 지민도 예외가 되지는 못했다. 첫날부터 얼빠지게 이온 음료를 빠뜨리는가 하면 연습복을 빠뜨리고 와서 창고 구석에 처박힌 오래된 체육복을 갖다주고.


마음에 드는 점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데. 그런 지민이 어느 순간부터 마음 한 구석에 조금씩이나마 쌓여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것을 좋아하는 감정이랑 연결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사실,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서는 서툴었다.


정확히 무엇인지도 몰랐고, 더군다나 어렸을 때부터 피겨에 대한 잦은 연습이나 훈련 때문에 부모님이나 사람과 떨어져있는 경우가 많았기에 사람을 사귀는 것도, 사랑을 받는 것도, 사랑을 주는 것도 서툴었다. 그런 점들이 드러나지 않았으면 해서 더 차갑게 구는 경향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잘 몰랐다. 모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지민의 고백을 거절하기에는 충분했다. 어줍짢게 사귀었다가는 상처만 줄 것 같았다. 가뜩이나 여린 녀석이 운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상상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싫다는 감정만은 확실히 들었다.


차갑고 사랑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더라도 양심이라는 것은 또 귀찮을만큼 잘 존재해서 문제였다. 상처입히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고백을 거절한 근본적인 이유였다. 다시는 지민에게 그런 말이 들려오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이상하게 매니저를 그만두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서서히 들고 있었다.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아니었다. 같이 있는다고 해서 두근거리는 감정도 없었고, 드라마에서 흔히 말하듯 운명의 짝같은 느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같이 있으면 즐겁고, 웃음이 나오고, 그 아이가 웃어줬으면 좋겠고, 행복해줬으면 좋겠고, 앞으로도 곁에 있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대체 지금까지 무슨 감정을 느껴왔던 것일까. 알 수가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고. 피겨 외에 인생에서 중점을 두는 감정이 늘어난다는 사실이 왠지 두렵게 다가왔다. 새로운 기술이든, 새로운 만남이든, 새로운 감정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새로운 것은 무서웠다.


그저 무서웠다. 그게 다였다. 냉장고에서 냉수를 꺼내 들이키려 뚜껑을 따다가 차마 마시지도 못하고 그대로 세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반동 때문에 울컥 밖으로 튀어나온 물들에 입모양으로 옅은 욕을 내뱉었다. 되는 일이 없었다.


게다가 고백을 거절한 것보다 더 찝찝한 기분이 드는 것은 다름 아닌 오늘이 지민의 생일이기 때문이었다. 오늘이 생일이란 사실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별 수 없었겠지만. 선물을 줬을까.


"...내가?"


무의식 중에 선물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누군가한테 선물을 해? 확실히 말하자면 25년의 짧은 인생을 살면서 그런 일은 결코 없었다.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고.


어이가 없어서 비웃듯 입밖으로 튀어나온 실소가 가소로웠다. 하도 오랫동안 운동을 쉬어서 그런가. 몸에 이상 반응이 온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선물을 준다니. 멍청한 생각이었다. 게다가 본인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사봤자 방해가 될 뿐이라고 생각했고.


하필 오늘이었다. 하필 오늘이 지민의 생일이었다.



-



"그래서."

"......"

"아파서 꼬박 일주일을 안 나오셨다?"


삐죽, 미묘하게 윤기의 미간이 치켜올라갔다. 아, 화나게 했나. 불안감이 마음속을 엄습해서 자꾸만 초조한 마음에 콩닥콩닥 심장이 뛰었다. 손가락을 마주잡고 꼼지락 거리다가도 언뜻 고개를 들면 서있는 그와 눈이 마주쳐서 눈을 고개만 푹 숙였다.


할 말이 없었다. 감기 몸살에 걸린 것은 사실이었고 병원에 가서 수액을 맞고 온 다음에도 하루종일 골골거렸으니까. 누가 알았던가? 그런 상태가 일주일은 지속될 줄은. 그동안 어느새 러시아 전지 훈련은 코앞에 다가오고 있었고 윤기의 연습 또한 무르익고 있었다.


"네에..."


힘없이 대답을 하고서는 어떤 반응인지 보려고 고개를 들었다. 일주일만에 보는 얼굴인데도 여전히 각이 선 게 누가봐도 윤기의 얼굴이었다. 지민이 알고있는 그 얼굴. 너무나도 좋아하는 그 얼굴. 차였다고 해도 좋아하는 사람의 감정이란 어쩔수가 없어서 심장이 자꾸만 멋대로 뛰었다.


"몸은."

"네?"

"몸 이제 괜찮냐고."

"아, 네!!!"


괜찮냐고 물은 말에 황급히 웃으며 대답하는 지민을 가만히 보던 윤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주일 전과 비교해서 확연히 말라있었다. 가뜩이나 말랐던 몸이 훨씬 더 가늘어져 있으니 눈에 띄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팠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일주일이나 안 나온 이유가 혹여 자신 탓일까봐 줄곧 긴장하고 있었던 터라 나은 게 다행이라는 심정과 동시에 안도하는 마음이 공존하고 있었다. 역시 아팠던 이유는 유독 추웠던 그 날 때문일까. 지민이 그 날 추워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따뜻한 곳에서만 있을수도 없는 상황이라 얼떨결에 밖으로만 다니는 하루가 되었지만 좀 더 신경써줄걸, 하는 후회가 왠지 모르게 남았다. 좋아하지 않는 상대라고는 해도 엄연한 매니저였다. 세계 그랑프리까지는 함께 가야할 몸이니까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 윤기씨! 제가 안무를 다 짰는데...혹시 봐주실래요?"

"어? 아...그래."


고백을 거절했다는 사실은 윤기 본인만 신경 쓰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축 처져서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지민의 얼굴에는 한껏 웃음이 들려있다. 괜히 의식해서 복잡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졌다. 본인이 괜찮다면야 상관없지만.


안무를 보여주겠다며 먼저 연습장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무언가 말을 하려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전이라면 같이 가자고 대기실 앞에서 웃으며 기다리던 모습과는 너무 상반되는 모습이라서.


왠지 모르게 이기적인 마음이 자꾸만 구석에서 솟아났다.

JM BOTTOM/ONLY SUJIM

짐데렐라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8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