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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 로테이션 15

"유치해도 막 웃고 그러시면 안돼요..."


춤을 추기 직전 안무 대형을 잡고서는 문득 생각났는지 지민은 고개를 휙 돌려 수줍게 말했다. 웃으려는 것인지 아니면 경고를 하려는 것인지 언뜻 새어나오는 입가 사이에 웃음이 여기까지 전달되어 오는 것만 같았다. 자신만만했던 아까의 모습은 어디가고 막상 보여주려니 긴장되는 모양이었다.


"안 웃으니까 빨리 좀 시작하지?"


독촉하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지민은 금세 다시 자리를 잡았다. 확실히, 예전부터 생각해왔던 것이었지만 몸선 하나는 예뻤다. 무용을 오래 쉬었다고 해서 무너질 몸이 아니라는 것 쯤은 알고 있었지만 안무를 가르쳐주기 위해서 딱붙는 옷들을 입고 있으니 몸매가 드러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행히도 안무에 정신이 팔려 그런 점은 자각하고 있지 않는듯 했지만. 이른 시각이라 빙상장에 있는 사람이 윤기와 지민 둘 뿐이라는 사실에 감사했다. 잔잔한 도입부의 노래가 틀어지자마자 표정이 단숨에 바뀌고서는 하늘로 날아올라 턴을 돌아버리는 지민의 모습에 입을 꾹 다물었다.


예상 외의 움직임이었다. 무용을 과거에 했다고 해서 지금 잘하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현대무용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터라 지민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안무를 처음부터 다시 손봐야 하나 싶은 걱정도 가끔가다 들었는데 일본 전지 훈련으로부터 몇 주 지나지 않아 지민이 들고온 안무는 상상을 뛰어 넘어 훌룡했다.


가만히 보고 있다가 피식 웃으며 턱을 괴고 지켜봤다. 앞에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쯤은 이미 진즉에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무용을 다시 시작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는데 적중이었나. 항상 봐오던 웃음과는 확연히 다른 차이가 있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빛났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할 때 비로소 빛나 보인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안무를 맡기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교적 어려운 기술들도 중간 중간 껴있는 경우가 여러가지였지만.


그 이후에 소화해 내는 것은 온전히 윤기 본인의 몫이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무어라 변명할 여지 또한 없었으니 남은 시간 동안 연습을 죽어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 전지 훈련도 바로 다음주인 만큼 다른 것에 정신을 팔 틈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노래가 뒤이어 끝나고 몇 분 남짓되는 동안 열심히 안무를 보여주던 지민은 어느새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가 바쁜듯 헐떡이며 내뱉고 있었다. 아무래도 제법 어려운 고난이도의 무용 기술들만 연신 반복했으니 그런 결과가 나오는 건 당연하다 싶었지만 예의상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어, 괜찮네."

"진짜요? 다행이다. 저 엄청 걱정했거든요. 윤기씨 경기에 해 되는 건 아닌가 하고..."


칭찬 좀 해줬더니 또 그 눈웃음을 지어오며 수줍게 말하는 모습에 피실 웃었다. 걱정은. 유치한 안무 짜와도 알아서 소화하겠다고 했는데. 그보다 이렇게 멋진 안무를 짜와 놓고서는 저런 말 하는 건 조금 반칙 아닌가.


"잘했ㅇ..."


칭찬이라도 해주려고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더니 이상하게 소스라칠만큼 놀라더니 움찔하는 지민의 모습이 두 눈에 가득 들어왔다.


"아."


미안. 서서히 손을 떼고 그를 바라보는데 오히려 더 죄송하다며 얼굴까지 붉히는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래, 나는 너를 찼었지.


너를 찼었지.



-



"존나게 붐비네."


공항에 들어오자마자 기자며, 몰려든 사람들이며 인산인해였다. 이래서 공개적으로 출국하는 것은 싫었다. 사람들과 마주하기도 싫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귀찮다는 이유가 더 컸다. 여권과 티켓을 꺼내며 뒤를 바라봤다. 무거운 짐들을 잔뜩 들고 뒤뚱뒤뚱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주겠다고 말을 해도 고집불통이었다. 매니저의 자격이니 뭐니, 알지도 못할 말들을 잔뜩 늘어놓는 탓에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으나 자꾸만 눈에 밟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눠서 들면 편할텐데.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다고 끝에 중얼거린 말은 무슨 뜻일까.


알다가도 모르겠다. 힘든 걸 전부 도맡아서 하는 게 매니저의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가벼운 짐 하나조차 들지 않고 출국체크를 하러 가자니 영 마음이 불편했다. 게다가 뒤에서 따라오는 지민의 헐떡이는 숨소리가 귓가에 들려 더 그랬다.


터지는 플래시 소리며 연이어 민윤기라고 외치는 함성 소리는 귀에 거슬렸다. 온전하게 조용한 것이 좋았다. 언제나 그랬지만 시끄러운 것이라면 딱 질색하는 타입이니까. 한숨을 내쉬고 뒤를 돌아보자 무거우서인지 눈을 감고 있다가 뜨는 지민과 시선이 마주쳤다.


피할까 싶다가도 가만히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서서 이 곳까지 오기를 기다렸다. 억지로라도 들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지ㅁ..."

"들어줄게요!"


손을 내밀어 짐을 가로채려는 순간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눌하게 굳은 한국어와 섞여 무거운 목소리. 너무나도 거슬리는 타이밍에 미간을 잔뜩 구기며 고개를 돌렸다.


"어...누구...?"


당황한 건 윤기 뿐만이 아니었는지 어색한 표정을 지은 지민은 어느새 손에 한가득 있던 짐들이 낯선 목소리의 주인에게 가있는 것을 보고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라, 근데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 스메노프 입니다."


한국말을 잘 해보려고 노력하는 것 같긴 한데. 눈 앞에 있는 것은 거짓말처럼 금발의 외국인이었다.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기도 전에 귓가에 '스메노프'라는 이름이 연달아 울려대서 화들짝 놀라 다시금 시선을 올렸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스메노프였다. 작년 세계 그랑프리 우승자였던 러시아 국가대표 스메노프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알 틈도 없었다. 이미 지민의 짐은 그에게 들려있었고 윤기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으니까. 그저 스메노프가 잔뜩 웃으며 지민에게 말을 건네는 모습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무거운 짐, 혼자 들면 힘들어요."

"아...그게...저는 진짜 괜찮은데..."

"들어줄게요. 민윤기 선수가 안 들어줬어요?"


그 말에 지민은 흘긋 반대쪽을 쳐다봤다. 윤기는 이 상황에 관심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관여되고 싶지 않은 것인지 시선을 두고 있지도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안 들어준 게 아니라 못 들게 한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괜히 무리 시켜서 가뜩이나 연습도 힘든데 다른 것까지 신경쓰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런 지민의 마음을 알기나 할까. 아니, 모르겠지. 금발의 외국인인 스메노프는 제법 커다란 키를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만난 것도 아니고 국내 공항에서 만나다니. 이건 제법 좋은 기사 주제라서 주위에서는 온통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훨씬 격하게 터진 게 문제였지만. 당황한 채로 우왕좌왕 바닥만 내려다보다가 이내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생각나서 고개를 들고 웃어보였다.


"가, 감사합니다."

"러시아 가는 거예요?"

"앗, 네! 전지 훈련으로요. 스메노프 씨도...?"

"네, 고향으로 돌아가요."


어눌한 발음이 마냥 열심히 하려는 것만 같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하게 만들었다. 작년 그랑프리 우승자 답게 하얀 피부와 각이 선 외모는 그가 피겨 스케이터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큰 키임에도 불구하고 몸이 잔뜩 말라있었다.


스케이터라면 당연할지도 모르겠지만 윤기 이외에 국가대표를 만나는 것은 또 처음이라 괜히 마음이 설렜다. 작년 우승자이니까 무슨 정보라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매니저도 처음인데다가 피겨 쪽은 더욱 더 처음이라 그랑프리에 대한 지식은 한없이 부족했다.


인터넷으로만 얻을 수 있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었다. 다행히 그는 우리와 같은 비행기를 탄다고 했다. 가는 내내 물어봐야지. 뿌듯한 마음에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나머지 짐들도 들어주겠다며 지민의 손에서 짐을 앗아간 그도 마냥 웃어보였다.


"박지민."


한창 웃고있는 차에 윤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차, 깜박 잊었다. 황급히 대답하며 고개를 돌리자 마주하는 것은 그의 얼굴이 아니라 뒷모습이었다.


"나 화장실 좀."

"아...네..."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복도쪽으로 가는 것을 가만히 바라봤다. 화장실에 간다는데 따라갈 수도 없고. 이 자리에 있어야 하나. 우물쭈물 있다가 그저 스메노프만을 올려다봤다.


"뭐야. 저 새끼는."


의식하지도 못한 차에 화장실로 향하다가 입 밖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이상했다. 괜히 짜증이 솟구쳤다. 뭔데 처음 보는 사이에 지민의 짐을 들어주며 지민은 뭐라고 그 새끼한테 그렇게 웃어주는 것인지. 짐이라면 윤기도 들어줄 수 있었다.


게다가 그렇게 무거운 짐도 아닌데 뭐하러 스메노프는 그렇게 생색을 내는 것인지.


"나는 뭐 안 들어주려고 했던 것 같아?"


괜히 걸음을 세게 해서 화장실로 향했다. 소변이 마려운 것도 아닌데 화장실에 들어와서는 애꿎은 손만 연달아 씻었다. 닦아도 닦아도 묘하게 화는 가라앉지를 않았다. 애초에 왜 화가 나지. 붙어있을수도 있는 것이고, 힘들어 보이니 도와주려 했던 것은 되려 감사하게 여겨야 하는 거 아닌가.


처음 보는 사이에 다가와서 화가 난 건가. 나는 사람 만나는 것을 싫어하니까. 그래, 그런 거야. 그런 거라고. 다른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야. 그저 갑자기 치고 들어온 게 짜증났을 뿐이야. 그런 저런 생각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보니 떡하니 구겨져있는 미간에 입술을 짖이겼다. 왜 짜증을 내는 건데, 민윤기. 알 턱이 없었다. 자기 합리화를 하며 생각을 이리저리 꼬아봐도 답은 나올리가 없었으니. 목이 탔다. 새까맣게 타들어 갈 것만 같았다.


물이라도 마셔야 정신을 차릴 것만 같아 물통을 놔뒀던 가방 쪽으로 손을 뻗었다.


"...아, 시발."


가방을 놓고왔다. 그것도 지민과 스메노프 사이에. 기다리고 있을 것이 뻔했지만 다시 그 둘이 있는 것을 보고 싶지만은 않았다. 러시아 국가대표라는 사람이 그렇게 한가하나. 남의 매니저 신경쓰고 있을 만큼? 그럴 시간에 연습이라도 더 하지.


아니면 자신 있다는 건가. 이번에도 우승할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니 더 괘씸해져서 어이 없다는 듯 바람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그렇게 나오신다 이거지? 5번은 더 비누로 빡빡 문지른 손을 탈탈 털고 휴지에 문질렀다. 하얀 손이 차가운 물이 닿았더니 더 하얗게 변질됐다.


기분이 더러웠다. 그러고보니 박지민 나 좋아한다고 했잖아. 좋아한다고 했으면서 왜 다른 남자랑 그렇게 시시덕거리고 있는 건데.


"아."


순간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무의식 적으로 우뚝 멈췄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지금...대체...


"진짜 찌질하다, 민윤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봤자 지민에게는 들리지도 않겠지만.

JM BOTTOM/ONLY SUJ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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