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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 로테이션 16

"진짜요? 와, 엄청난 거 아니에요?"

"아니, 뭘 그 정도까지는."


그래, 4회전 플립이 뭐가 대단하다고? 나도 하는데. 삐죽, 입술이 튀어나왔다. 왜 이렇게 짜증이 끝까지 솟구쳐 있느냐고 이유를 묻는다면 대답은 단순했다. 굳이 굳이 윤기의 옆 자리를 마다하고 스메노프의 옆 자리에 앉아서는 아까부터 작년 그랑프리 얘기만을 듣고있는 지민을 보자니 심기가 불편했다.


한숨을 내쉬었다가도 그 둘을 보고 있자니 화가 울컥 솟구쳐서 저도 몰래 고개를 휙 돌렸다. 보고 있기 거북한 장면이었다. 아까 승무원이 나눠준 콜라를 잔 끝까지 들이켰음에도 속은 가라앉지를 않는 것처럼 보였다. 체중 관리나 다이어트 때문에 비행기 안에서도 받아드는 것은 언제나 물이었는데.


이번 상황만큼은 예외였다. 톡쏘는 무언가를 위로 들이부어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애초에 이렇게 짜증나는 이유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평소라면 옆에 앉아서 밖이 예쁘다느니 구름 위를 걸어보고 싶다느니 말도 안 되는 것들을 닥치는대로 말하며 웃어댔을 지민이 다른 자리에 있었다.


휑하니 빈 옆자리가 괜스레 찝찝해 발 밑에 놔뒀던 가방을 들어올려 옆 자리에 턱하니 얹었다. 구겨질대로 구겨진 미간이 거슬렸다. 이러다가 주름 지면 책임질 건가. 아까부터 갑자기 등장한 저 놈의 러시아 국가대표는 뭐가 좋다고 지민 옆에 붙어있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지민이 예쁜 편이야? 귀여운 편이야? 뭔데 자꾸 달라붙어. 설마 관심이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런 저런 질문들을 하다가 문득 사고 회로가 탁 막혔다.


"...예쁜 편인가?"


하얀 피부에 잘 웃는 얼굴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제법 귀엽고 예쁜 편에 속했다. 그걸 굳이 따지면서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무례하게 처음 보는 사람한테 작업을 걸어? 그것도 라이벌인 한국 국가대표 매니저한테? 내가 옆에 떡하니 붙어있는데 그 옆에 오는 심리는 뭔데.


그리고 박지민은 그 이후로 왜 또 검정 니트 안 입는 거야. 조바심이 나서 자꾸만 손 끝으로 애꿎은 좌석만 톡 톡 두들겼다. 지민에게 고백을 받아서였는지 아니면 평소와는 다른 상황에 낯선 것인지 자꾸만 눈길은 그 둘에게로만 향했다.


사실 지민이 누군가와 사귄다면 딱 어울린다고 말할 상대는 스메노프였다. 다정한데다가 매너 있고, 무엇보다 지민을 배려하는 게 윤기 눈에도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게 다잖아. 세상에 뭐 남자들이 다정하고 매너있다고 다 좋은 남자들인가?


그러다가 또 괜한 생각을 한다 싶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게 무슨 질투하는 것도 아니고. 뭐하는 거지. 그냥 마음에 안 들면 앞에 나가서 말을 하면 되잖아, 말을. 하지만 그게 윤기 마음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자신과 있을 때보다 훨씬 잘 웃는 것만 같았고.


아침까지 우울해보이던 지민의 기분은 언젠가 보니 나아진 것처럼 보였으니까. 러시아 국가대표에게는 지금까지 관심이 없었다. 정녕 작년 그랑프리의 우승자라고 할지라도 이번 해에 우승자는 윤기 본인이 될 것이라고 호언 장담하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그런데 이쯤 되니 관심이 가지 않으려고 해도 관심이 갔다. 다른 감정이 있어서는 아니고. 그냥 신경 쓰여서.


신경 쓰여서 그랬다.



-



호텔로 가서 짐을 푸는 내내 윤기는 단 한마디도 입 밖으로 열지 않았다. 뭔가 화나게 만든 것이라도 있나 싶어 지민은 곰곰이 머리를 굴려봤지만 그럴만한 일도 없었는데. 혹여 저번에 고백했던 그 사건을 아직도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인가 싶어 뒷머리만 긁적거렸다.


사적인 관계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고백을 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었고 홧김에 나온 고백도 어떻게 하면 무마시킬 수 있을까 저번 일주일간 앓으면서도 생각해낸 결과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었는데. 공항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제법 평소와 다름 없었던 그의 상태가 유난히 이상했다.


툴툴 대면서 말하는 것도 그렇고 짜증을 내는 것도 그렇고 더군다나 어딘가로 잠시 사라지기만 해도 어디 있었느냐고 버럭 화부터 냈다. 지민으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임에 틀림 없었다. 이따금 그가 어딘가로 가면 지민을 찾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잠깐 몇 분 사라진 사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화내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분명 뭔가 거슬리는 것이 있을텐데 그것을 알 수 없으니 지민 또한 불안하고 걱정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전지 훈련은 러시아에서의 것이 그랑프리 전 마지막이었기에 이번 연습만큼은 어떠한 방해물도 있어서는 안됐다.


안무를 짜왔다 하더라도 온전히 소화해 내겠다고 말했던 점이며, 평소 그의 자존심이 유독 센 편이라 이번에도 우승하지 못한다면 끝없는 우울에 빠져들테니까. 그런 모습의 윤기를 보고싶지는 않았다. 그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소망하고 있었다. 그것이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언제부터 그를 이렇게나 걱정하고 이렇게나 바라보고 있었을까. 한숨을 내쉬었다. 이뤄지지 않을 사랑 따위는 필요 없다고 많이 생각했는데 반성하는 태도가 필요해 보였다. 윤기가 뭔가 이상하다고 해서 다가가서 무슨 일 있냐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백 전이라면 몰라도 고백 후에는 확연히 달라진 둘의 사이에 더이상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괜히 참견했다가 상처만 받고 돌아오는 건 아닌가 싶어 지민은 문득 두려워졌다. 사실 두려운 것은 당연했다. 상황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상태였으니.


이 상황에서 지민이 할 일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윤기의 심정을 건드리는 것 대신 스메노프에게 다가가 하나의 정보라도 더 많이 빼오는 것. 그게 당연한 일이면서도 매니저로서 그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다른 무언가로라도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박지민."

"네?"

"...요새 왜 도시락 안 싸와?"


그의 짐이라도 정리해주고 나갈까 싶어 침대 맡에 주저앉아 캐리어 안에서 옷을 꺼내던 지민의 손이 우뚝 멈췄다. 지금 뭐라고 했지? 잘못 들었나 싶어 눈만 끔뻑 거리는데 윤기는 다시금 한숨과 함께 말을 걸어왔다.


"왜 도시락 안 싸오냐고."

"네...? 아...그게..."

"나, 먹고 싶은데."


뭐가요? 지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들려오는 대답은 당연하리만큼 달았다.


"네가 해준 요리."


순간 자제하려고 해도 후끈 달아오르는 얼굴에 지민은 무의식 중에 얼굴을 푹 숙였다. 심장은 금세 쿵쿵 거리며 끝까지 달리기 시작해서 멈출 새도 없었다. 그는 이따금 훅 치고 들어오는 것이 매력이었으나 이번에는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지민의 마음을 파고 들었다.


더군다나 차인 후라서 마음 하나 없이 말한 것일텐데도 대체 왜 이렇게 그의 말 한 마디에 설레는 것일까. 숨을 깊게 들이켰다가 내쉬면서 마음을 조금이라도 진정시켜 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눈을 살짝만 돌려도 그의 얼굴이 앞에 마주하고 있었다.


표정 변화라고는 하나도 없는 차가운 얼굴인데도 불구하고 그 얼굴이 지민으로 하여금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무슨 말을 해야하나 싶어 망설이던 차에 그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리며 말했다.


"...됐어. 만들지마."

"아, 아뇨...그냥 조금 당황해서 그래요. 내일부터 만들어 갈게요!"

"됐다니까."

"아니, 그래도 윤기ㅆ..."


쾅. 뭔가 더 말을 하려던 찰나에 윤기는 호텔 방 문을 닫고 그대로 밖으로 향했다. 그렇게 당황한 표정을 할 필요까지는 없잖아. 평소에 해주던 요리를 이번에 다시 해주라고 부탁하는 게 그렇게 무례하고 나쁜 일이야? 편의점에 가서 무엇이라도 사먹어야 겠다고 생각하던 윤기는 짜증과 함께 치밀어오른 주먹을 그대로 벽으로 날렸다.


거칠고 둔탁하게 소리 나는 것이 귀에 거슬렸다. 세게 부딪힌 주먹은 벽에 아무런 자국을 남기지도 않고서 힘없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닌데. 왜 자꾸 짜증이 나지. 알다가도 모를 이유에 그는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답잖은 행동이었다. 자꾸만 조바심이 나는 자신의 몸상태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도시락을 싸오는 지민은 언제나 행복해 보여서 사실상 도시락을 먹는 것보다 헤실헤실 웃는 그 아이의 얼굴을 보는 것이 더 즐거웠다. 그래도 지금은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먹기라도 하고 싶은데.


윤기의 그런 마음을 몰라주는 지민이 그저 밉기만 했다. 상대방이 미우면서도 곁에 있어줬으면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런 감정이 슬슬 질리고 짜증났다. 확실히 말해 무슨 감정인지도 모르는데 왜 자꾸 집중력을 흐리는 것인지.


윤기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시기가 중요하고 연습에 무르익을 시간이라는 것 쯤은. 그걸 아는데, 아는데도 불구하고 관심은 자꾸만 지민에게로 쏠렸다. 잔잔하게 생각해보면 고백 탓이라고만은 간단히 생각할 수 없었다. 이는 분명 고백 전부터 이어져 오고 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게 진실이라면 상황은 더 심각했다. 지민을 만나고, 지민과 함께 하면서 상태가 이상해졌다는 소리니까. 그런 생각에 피실 웃음이 났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턱이 없었다.


"머리가 어떻게 됐냐, 민윤기."


웃으면서 한숨을 내쉬다가 편의점 냉장고에서 집은 냉수를 계산했다. 카드로 일시불을 그어 버리고 난 후에야 아, 하는 탄식과 함께 들고있던 생수 병을 힘없이 내렸다. 바보같은 짓을 해버렸다. 냉수는 방 안에도 잔뜩 들어있는데. 먹을 거리라도 살까 싶어 들어왔던 것임에도 계산한 것은 냉수였다.


어이가 없어서 그대로 실소를 터뜨렸다. 그대로 버릴까 하다가 차마 산 돈이 아까워서 그대로 두기로 했다. 냉장고에 넣어두면 언젠가는 먹겠지 뭐. 빨리 방으로 돌아가서 내일 있을 연습이라도 준비해야하나 싶은 찰나에 갑자기 앞에서 나타나는 인영에 우뚝 걸음이 멈췄다.


"뭐야."

"어...그러니까 윤기...민?"


다시금 들려오는 익숙하고도 어눌한 발음에 고개를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앞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스메노프였다. 호텔도 같아? 미간을 잔뜩 구기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조사라도 하고 오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호텔을 잡은 지민을 탓할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와, 이런 곳에서도 다 만나네요! 반가워요!"

"난 안 반가운데."


정성스레 대답해줄 필요도 없다 싶어 삐딱하게 입을 열자 예상했다는 듯 그는 웃을 뿐 더이상의 반응이 없었다. 그게 더 거슬렸지만.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상종하고 싶지 않은 녀석이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메노프는 옆으로 다가와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윤기씨, 물어볼 게 있는데요!"

"나는 대답해줄 게 없는데."

"그러지 말고 알려주세요. 지민이에 대한 겁니다."


뭐? 그 말에 걸음이 다시금 멈췄다. 뭐라 대답해줄 틈도 없이 그대로 날카롭게 쳐다봤다. 지민이? 방금 지민이라고 했어? 확실히 지민이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 그리고 자기가 뭔데 박지민에 대한 걸 물어봐?


"이 새끼가..."

"지민이 남자친구 있어요?"


생각보다 훨씬 당돌한 질문에 어이가 없어 뭐? 라고 대답하며 들고있던 생수병을 떨어뜨렸다. 남자친구가 있다니. 진심으로 물어본 건가. 하도 어이가 없어 허탈한 웃음만 짓고 있다가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생수병을 다시금 집어들었다.


"왜 묻는데."

"지민이, 귀여워요."


들려오는 대답은 결코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다. 짜증나기만 했을 뿐. 귀여워? 그대로 한 대 치려다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칠 이유가 없었다. 그대로 쳤다가는 법대로 처벌받을 것이 뻔했다. 참는 수밖에. 그저 참는 수밖에 없었다.


"박지민이 귀여운 거랑 남자친구 있는 게 무슨 상관인데."

"없다면 사귀고 싶어요."

"있어."

"......"

"박지민 남자친구 있다고. 엄청 잘생긴 사람."


그쪽보다 훨씬. 그 한마디를 툭 내던지고 그대로 복도를 걸어갔다. 더 있다가는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태였다. 그저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무슨 심정으로 지민에게 남자친구가 있다고 대답한 것인지는 잘 몰라도 그에게 만큼은 있다고 대답해두고 싶었다.


애초에 말이 되는지가 의아했다. 없다면 사귀고 싶어? 마음대로 될 것 같아? 전 세계에 남자친구 없는 사람만 해도 몇 만인데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알 턱이 없었다. 그의 논리대로만 친다면 근처에 지나가던 애인 없는 아무나 붙잡고 사귀자고 하면 사귀는 사이가 되는 것이었으니까.


호텔 방안에 들어와서는 문을 거세게 닫았다. 그 소리에 놀란 지민만 움찔할 뿐이었지만. 뒤이어 나는 거친 욕소리에 지민이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인지도 궁금했거니와 애초에 잠깐 나갔다 온 외출이라고 치기에는 지나치게 길었다.


헐레벌떡 정리하고 있던 짐들을 내팽개치고 윤기에게로 향했다. 어딘가 모르게 잔뜩 화가 나서는 씩씩 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다가 눈만 껌뻑였다. 화났어요? 라고 조심스럽게 묻자 노려보더니 그는 이내 아니라는 말을 하고서는 손에 들고있던 생수를 그대로 냉장고에 던지듯 집어넣었다.


"웬 생수...? 냉장고에 많은데..."

"몰라. 마시던가."

"아뇨...목은 아직 안 말라서..."

"그보다 내일 일정."

"네?"


풀로 잡아놔. 연습. 뒤이어 나오는 말에 지민의 눈동자가 금세 휘동그레졌다. 그의 입에서 말이 잘못 나왔을리는 없고 진심일텐데. 진심이라서 더 놀랄 말이었다. 내일 일정은 안 그래도 거의 하루종일 연습만 하는 일정이라 바쁜데 거기다가 풀로 잡아 놓으라니.


"왜, 왜요?"

"...스메노프 그 새끼는 꼭 이길거야."


농담할 기분도 아니라는 표정이었기에 쓸데없는 말대답 없이 다이어리를 펼쳐 열어 쉬는 시간을 다 없앴다. 도리가 없었다. 윤기가 이런 식으로 승부욕에 불탈 때면 어김없이 있던 일이라 대응하는 것은 느리지 않았지만 언제나 무리하는 모습이 보기 괴로웠다.


무리하지 말고 적당량 해줬으면 좋겠는데. 하긴, 말해봤자 들을 사람도 아니었다. 갑자기 스메노프를 이기겠다고 하고서는 평소 하지도 않던 실내 운동을 그는 다시금 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평소에 지민이 죽어라 말해도 하지 않았던 스트레칭들을.


"다음 동작 알려줘."


게다가 선뜻 먼저 알려달라고 다가오는 손길에 지민은 그저 동작을 알려주기만, 또 알려주기만 했다.



-



윤기는 예상대로 다음날이 되고서도 연습을 쉬지 않았다. 밤샘으로 연습하는 것은 그렇게 몸에 좋지 않다고 지민이 반복적으로 얘기해도 소용 없었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듯 했다. 풀로 잡으라는 말에 예상은 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렇다고 스케이트도 못 타는데 괜히 링 안으로 들어갈수도 없는 노릇이라 노래를 틀어놓고 연속적으로 안무를 반복하는 윤기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보니 속이 타들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고. 그만하고 쉬자고 말하려 해도 듣지를 않으니 원.


걱정이 되는 것은 당연한 심사였고 덕분에 빙상장을 벗어나지 못하는 건 지민 또한 마찬가지인 신세였다. 가만히 하얀 얼음을 바라보다가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봤다. 벌써 밤 9시. 아침 8시에 와서 한번도 쉬지 않고 저 상태이니 벌써 13시간 째였다.


밥도 하나 먹지 않고 오로지 섭취하는 것이라고는 중간 중간 잠깐씩 마시는 이온음료 뿐. 그 외의 쉬는 시간은 아무것도 없었다. 저렇게 머리에서 땀이 비오듯 쏟아지는데도 연습을 그만두지 않는 것은 무슨 심리일까. 하도 몸을 혹사 시키는 모습이 괘씸해서 한 마디 해주고 싶었으나 막강한 현실에 부딪혀 한숨을 쉬는 것밖에 할수가 없었다.


세계 그랑프리에서 우승해야할 그였기에 일부러 안무를 어렵게 잡은 점도 있었지만 4회전 플립을 성공시켜 턴을 돌면 더 멋있겠다고 생각해 그 기술을 넣은 것은 잘못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애초부터 지민이 그런 짓을 하지 않아도 승부욕에 활활 불타는 사람인데.


과도하게 난이도를 높여 괜히 더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만 같았다.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툴툴 거리며 윤기에게 들리지도 않을 불평을 해댔다.


"아니이...사람이 쉬면 뭐 덧난다고..."


이래서 연습 바보가 무섭다는 건가. 오래 서있어서 그런지 다리가 저렸다. 끙끙대는 소리를 내다가 발끝으로 두어번 툭툭 바닥을 치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턱하니 만졌다.


"엄마야...!"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예상 외의 인물이 서있었다.


"놀래키려던 건 아니었어요."


환하게 웃으면서 따뜻한 차를 건네는 사람은 다름 아닌 스메노프였다. 분명 다른 빙상장에 있었을 터인데 굳이 굳이 여기까지 온 이유는 설마 상대방 탐색하는 건가. 물론 스메노프로부터 정보를 따내는 것은 좋았으나 이 쪽의 정보가 새나간다면 위험한 일이었다.


"아, 여긴 웬일로..."

"지민이, 추워보여서 차 주러 왔어요."


어눌하게 웃는 모습에 지민도 덩달아 웃어보였으나 자꾸만 흘긋 시선이 윤기에게로 갔다. 스메노프가 온 것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여전히 그는 연습 삼매경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공개할 안무인데 이제와서 스메노프에게 들킬 수는 없었다.


"일단 우리 밖에 나가서 얘기해요. 지금 윤기씨 연습해서 방해되고..."

"아, 그러도록 하죠."


그대로 스메노프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이 것이 순수하게 윤기를 위해서 한 일이라 지민으로서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지만. 정작 배려받은 본인인 윤기로서는 그대로 우뚝 멈추는 상황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잠깐 연습을 멈추고 지민도 피곤할 법 하니 같이 따뜻한 코코아라도 마실까 싶어 링 밖을 바라보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다정하게 손까지 잡으며 스메노프를 빙상장 밖으로 끌고나가는 지민 뿐이었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벌써 그렇고 그런 사이까지 된거야? 가만히 얼음 위에 덩그라니 서서 허탈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까 낮에 우연히 들린 스메노프의 빙상장에서 그가 얼음 위로 턴을 돌던 것이 생각났다. 너무 멋있다고 저 기술 이름이 뭐냐고 물어오던 지민의 눈이 아직도 잊혀지지를 않았다.


확실히 그가 했던 기술들은 죄다 어려운 기술 뿐이라서 윤기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애초에 체격 차이의 한계 때문에 이뤄내지도 못했던 것들이고. 그런데 자꾸만 지민이 눈에 밟혀서 그런 것들을 신경쓸 여유 따위는 없었다.


온통 냉정했던 속이 다 뒤집혀지는 것만 같았다. 지민으로 하여금 머릿속이 이리저리로 다 섞여버려 곤란했다.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마지막으로 턴을 한 번 더 돌아야겠다 싶어 다시 한 번 뛰어오르자 그대로 얼음 위에 곤두박질 쳤다. 순간 발목이 아려왔다. 오늘 더이상의 연습은 무리였다.


스메노프와 지민이 붙어있는 것이 싫다고 하더라도 윤기가 직접 가서 떼어놓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윤기는 지민과 사귀는 것도 아니었고, 지민과 관련된 누군가도 아니었으며 지민이 누구를 좋아하고 누구와 사귀는지를 결정할 권리 따위는 더더욱 없었으니까.


왜 이렇게 싫은 거야. 나는 대체 왜 이렇게 그 아이가 러시아 국가 대표랑 붙어있는 게 싫은 건데. 잘 되는 건 좋은 거잖아. 그 아이가 행복하기를 바라잖아. 나보다 훨씬 잘생긴 외모에 조건도 그 정도면 좋고 작년 세계 그랑프리까지 우승한 사람인데 대체 왜 자꾸 비뚤어진 상태로 생각하는 건데.


"젠장..."


아까 넘어져서 다친 발목이 자꾸만 욱신거렸다. 그런데 호텔로 가는 길목을 계속 걷다보니,


마음이 아픈 것인지 발목이 아픈 것인지 어느덧 구분할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JM BOTTOM/ONLY SUJ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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