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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 로테이션 18

거짓말 같았다. 눈 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들이, 다가오는 모든 것들이. 그저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렇게 빨리 그리고 더디게도 마음 속에서 녹아가고 있었다. 달콤한 키스를 끝나갈 때 쯤 눈을 뜨니 그와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링 위에 주저앉아 있는 것이 추울 법도 한데 상황도 상황이다 보니 오히려 몸이 더 후끈 달아올랐다. 얼굴이 더 붉어질수도 없을만큼 홍당무처럼 빨개졌을 때 비로소 마주보고 있던 윤기는 입을 열었다.


"사실,"

"...네?"

"좋아한다는 감정이 무슨 뜻인지 나는 잘 몰라."


덤덤한 그의 목소리가 사뭇 귓가에 울렸다. 좋아한다는 감정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니, 알 것 같으면서도 오묘한 그의 어감에 입만 달짝였다. 지민의 볼에 가있던 손을 살며서 내리더니 그는 그대로 깍지를 껴서 잡았다.


"근데, 네가 내 곁에 있어줬으면 좋겠어."

"......"

"웃는 모습이 눈에 밟히고, 항상 웃어줬으면 좋겠고, 네가 웃는 곳이 언제나 내 옆이었으면 좋겠어."

"......"

"연습을 마치고 헤어질 때면 너무 아쉽고. 더 곁에 있어주고 싶은데 넌 애가 끼를 부리는 건지, 아니면 나를 놀리는 건지. 헤어질 때 쯤 되면 손가락 꼼지락 거리는 게 귀여워서 안아주고 싶어."

"......"

"갖고 싶다고 말하는 게 있으면 뭐든지 사다주고 싶고. 네가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

"행복했으면 좋겠고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바라면서도,"


그 말을 마치고서는 잠깐 헛기침을 하더니 이내 그는 말을 멎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 전에 들은 말들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귓가에 울려 심장이 두근 거렸다. 이윽고 잠깐의 침묵이 흐른 다음 그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 좋은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어."

"......"

"스메노프인지 아니면 러시아 대표인지 뭔지 하는 그 작자가 네 옆에 있지 않았으면 좋겠고."

"......"

"도시락 나한테만 싸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내가 먹는 걸 항상 옆에서 지켜봐주면서 여러 이야기를 해주면 좋겠어. 너 조잘거리는 거 잘하잖아."

"...지금 질투해요?"


윤기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입꼬리를 살짝 울려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공중에서 시선이 맞닥뜨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그는 피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뒷머리를 긁적거리더니 이내 한숨과 함께 그는 툭 내뱉듯 말 한마디를 던졌다.


"어. 질투해. 엄청 하니까 그거 하지마."

"저 도시락은 윤기씨 말고 아무한테도 안 싸주는데?"

"...아까 낮에 줬잖아."

"뭘 줘요?"


무슨 뜻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들을 하면서 제법 뾰로퉁한 표정을 하고 있는 그를 바라봤다. 아, 혹시 낮에 스메노프에게 줬던 과일 말하는 건가?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왔다. 윤기를 위해서 싸왔던 도시락을 남에게 줄 일도 없고 더군다나 그러고 싶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그런 표정을 지어왔다.


"그거 도시락 아니에요. 윤기씨가 도시락 다 먹으면 주려고 아껴뒀던 건데, 그렇게 안 해주면 밖에 안 나가겠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그냥 하나 주고 보낸 거예요."

"......"


한심하다는 말투인지 아니면 정말 변명이 하고 싶은 것인지. 웃으면서 말하는 지민을 바라보다가 꽤나 멋쩍어져서 시선만 돌렸다. 제법 낯부끄러운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다른 감정이나 생각은 들지 않았다. 꿈같은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상상도 못했으니까. 그저 괜찮냐고 물어오는 지민이 오늘따라 예뻐 보였을 뿐이고. 답잖게 속마음이 나온 것 뿐, 그것 뿐이었다. 그럼에도 뭔가를 기대하듯이 쳐다보는 지민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일을 여기까지 끌고와 놓고서는 살며시 발을 빼리라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그런 것들 다 하지말고. 그리고, 그랑프리가 끝나더라도 내 곁에 있어주면 좋겠어."

"......"

"아까 말했듯이 난 좋아한다는 감정이 뭔지 잘 몰라."

"......"

"그런데 이런 일들이, 내가 바라는 것들이, 내가 너에게 기대하는 것들이 세상에서 '좋아한다'라는 감정을 의미하는 거라면."

"......"

"나 너 좋아해, 박지민."


윤기의 성격은 차갑다고 말할 수 있을만큼 냉담한 정도였다. 그 사실을 본인도 잘 알고 있었고 사실 지금 입에서 나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턱도 없었지만 고백을 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몇 주 전 일이 떠올랐다. 좋아한다고 다짜고짜 고백하는 지민의 얼굴부터 그 날 고기를 사줬던 일들까지.


생각해보니 물질주의적인 사회라서 돈을 쓰는 걸 선뜻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는데 지민에게 무언가를 해줄 때 만큼은 스스로도 기뻤으니 그 때도 좋아했던 감정이 있었다는 건 분명했다는 점인가. 그 생각에 피실 웃음을 지어보였다. 답은 정해져 있던 것이었는데. 거기까지 닿는 과정에서 시간을 너무나도 많이 소모해 버렸다.


고백같은 걸 잘 하지도 않고, 지금껏 스캔들이 잘 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 알고있을 지민이 이상하게도 고백을 들은 후 대답이 없었다. 묘하다 싶어 옆으로 돌렸던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마주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마주한 얼굴은 이미 붉어질대로 한참은 붉어져서 터질것만 같은데, 뒤이어 멍해져있던 눈에 눈물이 가득차고 뚝뚝 떨어지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야, 임마. 너, 너 왜 울어."


당황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그저 지민과 맞잡은 손을 당겨 품에 안았다. 품에 안았는데도 흐느끼는 게 심해서 그런지 달달 떨리는 몸이 안쓰러워 그대로 더 꽉 안았다. 따뜻한 기운이 느껴진 것인지 손을 뻗어 더 안기면서도 그치지 않는 울음에 한숨만 푹 내쉬었다.


"왜 우는데. 내가 고백한 게 괘씸해? 저번에 거절해놓고 이번에는 고백해서?"

"아니...그...그냥...좋아서...좋아서요..."


좋다는 말만 연신 반복하며 훌쩍거리는 녀석이 새삼 귀여워서 피실 웃었다. 그래, 오죽 좋겠냐.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면서 귓가에 입을 맞췄다.



-



"뭔가 이번 러시아 전지훈련에서는 얻어가는게 없지 않아요? 저번 일본 때는 그래도 점프 하나는 얻어갔는데...괜히 몸만 상하고 돌아가는 것 같아요."


분명 이주일 전에 왔을 때만 해도 가방에 잘만 들어가던 짐들이 갑자기 출국하려고 하니 캐리어에 잘 담기지 않았다. 옷들을 접고도 또 접었는데 들어갈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 위에 올라앉아 지퍼를 잠그고 있던 지민이 한숨만 푹 내쉬었다.


아까 한 말은 진심이었고 사실이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항상 냉정심만 유지하던 그의 본성이 나타나서인지 점프도 곧잘 성공했고 연습을 왔던 다른 선수들에 비해 확연히 눈에 띄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와 비교해서 이번 러시아 훈련은 엉망이었다.


우선적으로 연습을 무리하게 해댄 탓에 발목을 다친 윤기도 있는 데다가 그에 상응하지 않게 성과를 얻어내지 못한 점도 있었다. 선수의 몸이 상한 것에 대해서는 매니저도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었기에 마음이 울적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말렸어야 했다. 마음 쓰고 있다는 사실 알고있었으면 그런 거 아니라고 말해줄 걸. 그랬다면 지금 발목 상태가 더 나아졌긴 했을까. 되지도 않는 생각을 하며 울상을 짓고 저 만치에 서서 옷가지들을 챙겨나오는 그의 발목을 바라봤다.


하얀 붕대가 감아진 모습이 약올리기라도 하듯 미웠다. 겉으로 봐도 부어보이는 모양세가 영 보기 싫었다. 입술만 삐죽 내밀고 있는데 가까이 다가온 그는 침대 위로 옷들을 한번에 던져버리고서는 그 옆에 걸터앉았다.


"왜 얻은 게 없어."

"그래도..."

"너 얻어가잖아."

"아니!!!"


갑자기 훅 들어오는 그에 얼굴만 붉혔다. 당황하는 지민과는 달리 옆에서 옷을 얌전히 개서 하나하나 건네주는 그가 내심고마웠다. 아무런 대꾸없이 혼잣말만 중얼거리다가 다시금 눈은 그의 발목으로 향했다. 그것을 눈치 챈 것인지 뒤이어 그는 지민의 이마를 검지로 꾹 누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왜 자꾸 시선이 그 쪽으로 가는데."

"......"

"내가 신경쓰지 말라고 하면 신경 쓰지마. 네 탓 아닌 거 너도 알잖아."

"그게 아니라..."

"발목 다친 건 애초부터 내 부주의였고. 한국 돌아가서 물리치료 받고 하면 금방 나아. 그러니까 걱정하지말고 짐이나 싸."


평소대로 냉담한 말투였다. 이런 점이 좋기는 했지만 뒤이어 아무 대답도 없는 지민이 신경쓰여서인지 커다란 손으로 부드럽게 머리칼을 쓸어오는데 그런 그의 손길이 좋았다. 온전하게 그 따뜻함을 느끼다가 두 눈을 꼭 감았다. 한국으로 들어가면 뭐부터 하지? 데이트? 아, 한강도 같이 가보고 싶다.


무용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로 애인을 제대로 사귀어보지 못했던 까닭도 있었지만 데이트나 그런 것에는 어느 정도 로망이 있는 편이라 해보고 싶었는데. 사실 그랑프리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윤기에게 그런 것들을 요구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랑프리가 끝난 후에도 같이 있어달라고 했고 끝나면 은퇴할 거라고 말했으니까 쭉 같이 있을 수 있겠지, 뭐. 꾹꾹 눌러 겨우겨우 캐리어를 다 닫은 후에야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짐들을 들고 공항까지만 가면 끝이었다. 러시아에서 한국이라, 짧지는 않은 비행이 다시금 시작될테지만 별 상관 없었다.


이번에는 눈치 보지 않고 그의 어깨에 기대어 날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줄곧 기대보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차였던 사이라서 그런 것은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가능하다는 것이 기뻤다. 순전히 기뻤다.


"가요."


무거운 짐들을 여러개 들고 웃으면서 그에게 말했다.



-



"아, 아니 윤기씨!!! 잠깐만!!! 제가 들겠다니까요?"


넓은 러시아 공항 한복판. 택시를 타고 공항에 도착한 것은 불과 몇 분 전. 아까부터 줄곧 지금까지 공항에서는 제법 울적해 보이는 한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아닌 지민이었지만. 문제는 간단했지만 복잡했다.


호텔에서부터 짐을 다 들었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공항에 도착하면 그럴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오만한 지민의 생각을 뛰어넘기라도 하듯, 윤기는 훨씬 더 앞장 서서 모든 짐들을 들고 출국심사를 받으러 향하고 있었다.


곤란한 일이었다. 곤란해도 한참은 더 곤란했다. 짐을 드는 일은 매니저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게 훈련을 마치고 고된 몸으로 다시 한국으로 입국하는 선수의 매니저라고 하면 더더욱. 훈련 끝이라고 하더라도 공항에는 기자들이 가득했고 셔터들이 터지는 일도 다반사였다. 지금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제가 들게요!!!"

"뭘 들어. 무거운데."

"무거우니까 제가 든다는 거죠!!!"

"무거운데 그걸 왜 네가 들어."

"제가 매니저잖아요!!! 윤기씨 힘들고. 그냥 제가 들게요!"

"매니저이기 이전에 지금은 내 애인이잖아. 나 너한테 힘든 일 안 시키고 싶어."


기자들에게도 의아하지 않은 광경일수가 없었다. 매니저가 들어야 할 짐들을 온전히 선수가 들고가고 있으니. 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겠지.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들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한참은 앞으로 가서 먼저 걷고있는 그의 곁으로 걸음을 바삐해 따라갔다.


짐을 달라는 뜻으로 손을 내밀었더니 그는 흘긋 보다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이거 뭔데."

"짐 달라고요."


손을 계속 뚫어져라 쳐다보고만 있던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뒤이어 왼손에 있던 짐들을 전부 내려놓길래 짐을 주려나 웃으려던 찰나, 아뿔사. 아무래도 그를 너무 얕봤던 것 같다.


"아니 잠깐만!!!"


오른손으로 짐을 전부 몰아놓고서는 왼손으로 그대로 손을 잡아오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기자들 있다고 소리를 질러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되려 보이려고 애쓰는 것만 같아 보였다.


"미쳤어 진짜!!!"

"미쳤으니까 그냥 좀 가지?"


놓으라고 발악을 하면 할수록 그는 맞잡은 손을 더 세게 끌어당겨 자신의 쪽으로 가까이 오게 만들었다. 손을 잡은 그 순간부터 셔터 누르는 소리가 거세지는 것은 막을수가 없었고 플래시가 더 터지는 것도 막을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스캔들이 한번도 터지지 않았던 그에게 이런 소식이 치명적인 기사 헤드라인이 될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우여곡절 끝에 출국심사를 받고 안으로 들어왔을 때야 요란하게 휴대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상대는 다름 아닌 친한 친구 태형. 뒤이어 들려오는 커다란 고함소리에 귀가 울렸다.


"야 너 민윤기 선수랑 사귀냐?!!!"


아.


망했다.

JM BOTTOM/ONLY SUJ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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