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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 로테이션 19

지쳤다. 명백히 말해서 지쳤다. 기나긴 비행 시간도 한 몫 했지만 입국하자마자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 세례에 일일히 답해주는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단순히 러시아 공항에서 손을 잡고 들어간 것 뿐이었는데 대체 어느 정도로 파급력이 있었기에 이 정도까지 몰려든 것일까.


그런 질문들이 머릿속을 마구 나뒹굴었으나 입국하자마자 기사를 검색해 보자마자 납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사 제목들은 죄다 자극적이면서도 또한 거짓이지는 않을 수 없어서 머리가 어질거렸다. 우선, 열애설이 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국가대표 선수의 열애설이 어떻게 이 정도까지 영향을 미치냐는 질문에 예외가 된 점은 그 열애설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민윤기'이기 때문일까. 애초부터 스캔들이라고는 하나 없었던 선수이기도 했고 잘생긴 외모로 인기 몰이도 하고있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게다가 연애의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매니저라니. 자극적인 가쉽거리가 되기는 쉬운 주제였다. 그런 점은 물론 인식하고 있었던 상태였지만. 차를 타고 다시금 그의 집으로 이동하는 동안 기사들을 하나하나 읽으며 놀란 티를 팍팍 냈지만 도리어 그는 당황하는 기색 하나 내비추지 않았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으나 그 기사 몇 개 터진다고 무슨 일이라도 생기냐는 얼굴로 쳐다보기에 따지는 것을 관뒀다. 애초에 피겨 말고는 딱히 꽂히는 것들이 없는 그였다. 그런 상태로 열애설이 터졌다는 사실을 강조해봤자 크게 타격을 받을 일은 없다고 생각했고 다시금 생각해보니 열애설 터진 게 뭐 그렇게 큰 대수인가 싶었다.


열애설이 터졌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피겨 국가대표이고, 지민은 여전히 매니저니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다고. 내가 일부러 꼬시거나 그런 게 아니라니까?"

-너 임마, 얼마전까지 그런 언질도 없었잖아.


미칠 지경이었다. 열애설이 터져서 걱정되는 일은 그의 이름에 영향력이나 파급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지민에게 걸려오는 수많은 확인 전화들이었다. 그 점을 알았어야 했는데. 열애설이 터지면 혹여 그랑프리에 악영향이 갈까 하는 걱정 뿐이었지 다른 외적인 것들을 신경쓸 겨를은 없었다.


열애설이 터진 게 사실이냐고 확인한다며 이토록 많은 전화들이 걸려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침부터 쭉 걸려오는 전화에 대답하기도 급급했기에 우선적으로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매니저 일을 소개시켜준 호석의 전화를 마지막으로 그대로 휴대전화의 전원을 껐다.


경쾌하게 울리는 종료 음과는 달리 기분이 사뭇 우울했다. 이러다가 혹시 윤기씨 전화 왔는데 못 받는 거 아니야? 하긴. 애초부터 전화를 먼저 거는 사람이 아닌데 사귀는 사이 됐다고 바뀌는 게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입술을 삐죽 내밀고 일주일이 넘도록 집을 비운 터라 휑한 티가 나는 거실바닥을 바라봤다.


먼지가 쌓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청소를 하지 않고 넘어가기는 애매한 정도의 더러움이었다. 그러고보니, 그 날 이후로 윤기의 집에는 간 적이 없는데. 아직도 더러울까? 다음번에 한 번 청소하러 가야겠다. 아, 그런데. 이번에는 애인으로 가는 거겠지?


걸레에 물을 잔뜩 먹여 거실 바닥을 닦다가 갑자기 드는 부끄러운 생각에 우뚝 손을 멈췄다.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미쳤나봐, 혼자서 중얼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히 헛기침을 하며 다시 바삐 손을 움직였다. 잡생각을 없애는 데에는 청소가 최고였다. 전원을 꺼둔 휴대전화가 신경 쓰였지만 다른 전지 훈련보다 기간이 조금 길었던 러시아 전지훈련이었던만큼 휴가 기간도 길기에 그 사이에 윤기로부터 연락이 오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시 말해, 공적으로는 완전히 시간이 빈 턱이었다. 휴가 기간 동안 무엇을 해야할지 생각을 해두지는 않았으나 그 간에 윤기는 아마 다친 발목의 물리치료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나으면 좋겠다..."


먼지가 잔뜩 묻은 걸레를 화장실로 갖고 들어가 다시 빨며 수줍게 웃었다. 그랑프리까지는 대략 3개월쯤 남아있었고 아마 새하얀 눈이 서울에 내리게 될 쯤에는 빙상장 위에 그가 서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얀 눈과 하얀 그는 꽤 잘 어울리는 편이라서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될 수 있다면 다음번 기회가 될 때 스케이트를 배워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꼭 피겨가 아니라도 괜찮으니까, 그가 좋아하고 아끼는 스포츠가 어떤 느낌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처럼 차가운 느낌일까. 아니면 그러면서도 즐거운 느낌일까. 아니면 전혀 색다르게 두둥실한 느낌일까.


상상을 할수는 없었지만 일단 지금은 매니저의 일이 더 우선적이었으므로 스케이트를 배울 틈 따위는 없었다. 그랑프리가 종료되고 나면 진지하게 다시 시간을 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생각해보니 이번 해를 마지막으로 집 계약 기간도 끝나가는 터라 이사할 필요가 있었다.


집도 알아봐야 했고, 동시에 윤기가 수행하는 안무의 진행도도 봐야 했으므로 해야할 일들은 산더미였다. 입꼬리를 올려 베시시 웃다가 뒷머리를 매만졌다. 쉬는 휴가가 좋으면서도 하루 빨리 그를 만나고 싶었다. 이제 마음껏 좋아한다고 속삭여도 되고 마음껏 그를 만져도 상관없는 일이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마음이었다.


그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깔끔하게 백색으로 돌아온 걸레를 세탁기에 던져 넣었다. 아까 집 들어왔을 때만 해도 황혼이 지고 있었는데 어느덧 새까매진 하늘이 두 눈에 들어왔다. 지민의 집은 3층으로 비교적 낮은 편이여서 하늘과 가깝다는 표현은 옳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베란다에서 바라보는 하늘이 기분 좋았다.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갔다. 칠흑으로 물든 하늘을 가만히 바라봤다. 아쉽게도 별은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으나 세상이 어둠으로 전부 뒤덮여 버린듯한 상쾌한 기분이 마음 속에 자리 잡아서 왠지 모르게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슬슬 환기도 다 됐겠다 싶어 나가며 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순간 시선을 바닥으로 내린 순간 눈이 커졌다.


"윤기씨???"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코트 차림의 윤기였다. 3층에서 밖을 내려다 본 것이라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형태로 보나, 체형으로 보나 어딜봐도 그였다. 놀라서 깊게 숨을 내쉬니 추운 날씨를 증명이라도 하듯 허연 입김이 새어나왔다.


반팔 위에 얇은 가디건을 걸치고 헐레벌떡 밖으로 뛰쳐나갔다. 오늘따라 계단을 내려가는 속도가 왜이리 더딘지. 급하게 두 칸 씩 뛰어내려가다가 기어이 넘어질 뻔했지만 놀랄 틈은 없었다. 겨우겨우 1층에 도착하고 나서야 시야에 들어오는 인영에 걸음을 멈췄다.


역시나 그였다. 제법 추운지 코트 위에 감싼 겨자색 목도리에 입을 묻고서 이쪽을 곧게 바라보고 있는 그와 시선이 맞닥뜨렸다.


"윤기씨..."

"눈치 채는 거 느리더라."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주머니 속에 넣어뒀던 손을 꺼내 입가까지 올라와있던 목도리를 끄집어 내렸다. 이런 날씨에 겨우 코트 한 장을 걸치고 온 터라 추운 것은 당연했는데 그런 기색을 낼 필요도 없다는듯 그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갔다.


평소라면 장난에 응해줬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럴수도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그대로 그의 손을 맞잡았다. 확 닿아오는 차가운 기운에 눈이 휘동그레졌다. 생각보다 훨씬 그의 손은 더 얼어있었다. 장시간의 비행 탓에 가뜩이나 피곤할텐데 여기는 왜 왔냐는 질문에도 그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미련하게.


미간을 잔뜩 구기고 입술을 삐죽 내밀자 그는 가만히 바라보다 잡힌 손을 그대로 주머니 속으로 함께 넣었다. 코트가 얇은 탓에 주머니 안으로 손이 들어간다고 해도 그다지 따뜻하단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올 거면 연락이라도 하지..."

"했는데."

"네?"

"연락했다고, 나."


아, 지민의 이런 표정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멍청하게 벙찐 표정. 휴대 전화를 꺼놨다는 것까지는 생각이 닿지 못했었는지 연락했다는 말을 하자마자 굳어져가는 표정이 귀여워서 그대로 바라봤다. 입국 당일부터 집까지 찾아올 것이라는 건 예상도 못한듯 보였다.


"휴대폰 꺼져있던데."

"그게요...그게 아니라..."


변명이라도 하고 싶은 것 같아 보였는데 막상 휴대전화가 꺼졌다는 것은 사실인터라 궁색하게 뭐라 할 말도 없는지 지민은 입술만 삐죽거리며 중얼거렸다.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달싹거리며 움직이는 붉은 입술을 바라보고 있다가 기어이 입꼬리를 올려 피식 웃었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요?"


진지하게 물어오는 눈빛에 걱정이 잔뜩 담긴 것을 알기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입만 굳게 닫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기다린지 꽤 된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자니 또 화를 낼 것 같아 가만히 잠자코 있었다. 빨리 안 말하냐고 성을 내길래 가만히 보고 있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냥 조금."

"몸이 차갑잖아요. 오래 기다린 거 아니에요?"

"아니야."

"그리고,"


피곤할텐데 왜 왔어요? 웅얼거리면서 주머니 속에 넣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코트 깃을 여며주는 지민을 바라보다 그대로 다른 한 손도 맞잡아 쥐어 주머니 속으로 넣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랐는지 다시 커지는 눈을 바라보다가 무표정으로 딱 한마디 내뱉었다.


"보고싶어서."


아. 어떻게 이리 정직하게 반응하는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귀끝까지 붉어지는 것을 보고 맞잡은 손에 꽉 힘을 주었다. 시선을 마주치기는 또 부끄러운지 지민은 눈을 피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똑같이 고개를 틀어 시선을 마주하자 힉, 하고 생경한 소리를 내더니 이내 지민은 눈을 꾹 감았다.


하다못해 그것까지 귀여워서 웃는 소리만 냈다.


"그래서. 나 지금까지 기다렸는데 상같은 건 없나?"

"...무슨 상이요."

"나 추운데도 기다렸잖아."

"아니...!!! 제가 언제!!! 기다리라고 했어요..."


버럭 화를 내다가 똑바로 쳐다보는 눈에 기가 죽었는지 금세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품을 빠져나가려는 것인지 꿈틀 대는 것을 그대로 손에 힘을 주어 당겼다. 확하고 품에 푹 안기는 것이 딱 좋았다. 여기서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으면, 그렇게 생각했다. 이 정도가 좋았다.


아무말도 못하고 잠시동안 그렇게 안겨있던 지민은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무슨 상을 줘야 하는 건데요..."


삐진 것인지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다른 곳을 본 채로 웅얼거리는 것을 보다가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어 두 볼을 맞잡았다.


"이거면 돼."


그러고서는 그대로 얼굴을 틀어 입술을 맞췄다.


간밤의 키스는 달았다.



-



"야 임마!!! 민윤기, 너 제대로 안 해?"


커다란 빙상장에 굵은 고함 소리가 울렸다. 앉아서 스케줄 표를 정리하고 있던 지민만 움찔해서 눈을 질끈 감을 뿐 다른 사람들은 익숙하다는 식으로 일상적인 일들을 수행해 나갔다. 평소와 달리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윤기의 코치가 연습을 보러오는 날이었다.


당최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받거나 지적을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그라 코치를 언제나 옆에 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코치가 오더라도 지적한 적이 없는 날이 태반이었는데 오늘만큼은 예외인듯 싶었다. 링 옆에 바싹 붙어서 윤기의 연습을 뚫어져라 지켜보던 코치의 입에서 몇 번이고 욕소리가 튀어나왔으니까.


그렇다고 그 옆에 가서 그만큼이나 혼내지는 말라고 설득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몇 번이고 코치에게 꾸지람을 들으면서도 웬일로 그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웃는 것도 아닌 것이, 피겨를 해서 좋다는 감정만으로는 형용할 수 없는 즐거운 표정을 만들고 있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코치도 뭐라 할 말이 없는지 어이 없다는 식의 웃음과 함께 한 마디 했다.


"너 지금 이게 몇 번 째 오버 로테이션(*오버 로테이션: 점프 시 회전이 지나친 것)인지 알아? 얌마, 정신 찬 차리냐?"


호통에도 단숨에 얼음을 가르고 상쾌하다는 듯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그를 막아세울수는 없었다. 몇 번 소리치던 코치도 어느 틈에 지쳤는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평소에는 오버 로테이션의 '오'자도 모르던 녀석이."

"저 잠깐 휴식."


코치의 말도 무시한 채로 링 밖으로 나와서는 씨익 웃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보고 있다는 것을 들켜서인지 부끄러운 마음에 헐레벌떡 다시 펜을 쥐고 다이어리로 눈을 돌렸다.


"좋은 일 있냐니까."

"그냥 조금."


조금요. 알지 못할 의미 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그는 수건을 목에 둘렀다.

JM BOTTOM/ONLY SUJ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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