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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 로테이션 23

샤워를 끝낸 뒤 마시는 시원한 맥주는 어지간히도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조금은 여유롭게 나오는 클래식 음악. 샤워가운을 걸친 채 한 손에는 맥주를 들고 침대에 걸터 앉았다. 지민을 만나기 이전이라면 경기 일주일전 평소 하지도 않았던 긴장감이라는 녀석을 느끼며 욕짓거리를 내뱉고 있었겠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대회 전 데이트라니. 아찔해도 너무 아찔했지만 덕분에 긴장이 사라져 그것만큼은 피차일반 감사해야할 대상이었다. 아직 시간은 8시밖에 되지 않았기에. 이 정도 되면 지민도 어느정도 씻고 방 안에서 얌전히 TV나 보고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밥이나 같이 먹자고 할까.


경기 일주일 전이라 시간이 텅텅 비는 것이지 얼마 전까지는 빙상장 외에는 만나기조차 힘들었던 두사람이었다. 더군다나 빙상장에서 만날 때는 매니저와 선수의 관계 외에는 다른 감정은 찾아보기가 힘들었으니 원.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그러한 그의 태도에 지민 또한 불만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나름 존중하겠다는 의지였겠지. 그 덕택일까. 한 시라도 떨어지기 싫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방으로 끌고 들어와 하루 종일 품에 안고있을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잠깐 떨어져 있더라도 밥을 같이 먹고 산책도 같이 나가는 편이 윤기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추위 탓에 발그랗게 상기되어있던 볼이 이젠 따뜻한 호텔 냉방 기운 탓에 다시금 붉게 달아올랐을 것을 생각하니 살풋 웃음이 새어나왔다. 옆에 있지도 않은 사람 상상하면서 웃는 기묘한 취미가 최근 들어 생긴 것만 같았다. 어떻게 보면 참 변태같은 얘기겠지만.


상관 없었다. 상상의 대상이든 어떻든 조금 있으면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전화를 먼저 해둔 후에 옷이라도 갈아입어야겠다 싶어 협탁 위에 놓여진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전화를 잘 쓰는 편이 아니었는데 최근 연락처를 열자 나오는 이름들은 수두룩하게 오로지 '지민'뿐이었다.


가득찼다는 표현이 딱 어울렸다. 그리고 그 이름으로 가득차는 것만이 꼭 기분 나쁘지만은 않았다. 되려 좋았다. 익숙한 번호를 꾹 꾹 누르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곧 있으면 철컥하고 받는 소리가 들릴 것이고 그 후에 같이 저녁을 먹자고 얘기할 생각이었다.


침대에 털썩 누워 눈을 감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시간이 제법 지난 것 같은데 신호음은 연달아 반복되고 있었다. 한참 전 받았어야 할 전화가 연결이 되지 않자 윤기는 사뭇 눈살을 찌푸렸다.


"씻는 중인가..."


그런 이유라면 함부로 방해할 수 없었다. 씻는 도중에까지 전화를 받아줬으면 좋겠다는 무리한 부탁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씻는 데에는 얼마 시간이 걸리지도 않으니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좋아하던 교향곡이 다른 합주곡으로 트랙이 바뀌었다.


잠이 오는 것도 아닌데 잠시 게슴츠레 떴던 눈을 다시 감았다.



-



"박지민."


복도에 연신 적당히 문을 두들기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전화 한 번 받지를 않고. 기다리다 못해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옆방 문을 두들겼지만 아니나 다를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우당탕하는 소리라면 평소처럼 덜렁거리던 녀석이 옷이라도 급하게 챙겨입고 있구나 하겠는데. 쥐죽은듯 조용한 방은 지나치게 의심스럽고, 한없이 마음을 어둡게 만들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어디에 있는거야. 다시 한 번 통화 버튼을 눌러 지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방 안에서 익숙한 벨소리가 울리는 것에 잠시 고개를 돌렸으나 음성 사서함이라는 말이 나온 후까지 전화벨은 끝내 끊기지 않았다.


"뭐야..."


설마 휴대폰을 놔두고 외출한 건가. 녀석이 아무리 둔탱이라도 그렇지 그렇게 둔감한 녀석이 아니라는 것 쯤은 윤기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가정할 수 있는 사실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만큼 정신이 없었거나, 다른 하나는 예기치도 못한 위험한 일이 닥쳤거나.


전자든 후자든 위험했다. 방 안으로 돌아가 얇은 저지를 걸치고 나서는 밖으로 걸음을 바삐했다. 밤이라서 그런지 아까보다 훨씬 거세진 바람이 얼굴을 할퀴었다. 눈살을 찌푸리기도 잠시, 우뚝 멈춰설 여유는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지민을 찾아야만 했다.


경찰에 신고라도 해야하나 싶었지만 러시아 경찰이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않다는 사실은 그가 제일 잘 알았다. 이렇게 추운 날씨 속에 자국민도 아니고 동양인 하나가 안 보인다고 한들 납치를 당한 것도 아니고 제대로 수사해줄 리가 없었다.


이미 휴대폰으로 전화하는 수단은 쓸모가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주머니 깊숙히 넣어둔 건 오래전 일이었다. 아까 지민과 함께 돌아다녔던 길거리를 하나하나씩 차례로 돌아다녔다. 그 아이가 예쁘다고 했던 커다란 트리. 정원이 잘 관리되어 있어 눈이 쌓였던 게 꼭 눈꽃같다고 신나했던 성당 앞.


지민을 안아줬던 횡단보도 앞. 웬일로 거리인데도 불구하고 선뜻 먼저 키스해오던 거리 앞.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디에도 지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박지민!!!"


외쳐도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목청을 높였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불안해 미칠 것 같아서. 설마 어디에서 길을 잃고 울고있는 건 아니겠지. 호텔 방에서 잠든 거 아니야? 차라리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마지막으로 가볼 곳은 다리 밖에 없었다. 설마 다리 위에서 또 야경을 바라보다가 강으로 떨어졌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후에 지민이라면 충분히 그럴만하다고 든 생각에 가빠져오는 숨을 억누르고 걸음을 바삐했다. 한참을 뛰어 도착한 다리는 이제는 제법 늦은 저녁이라서 그런지 지나다니는 몇 사람 말고는 아까처럼 구경하는 이들은 적었다. 와중에도 강가에 비춰오는 야경이 더럽게 예뻤다.


"시발..."


지민이 들으면 화낼 것이라는 걸 아는데도 입 밖으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그런 것을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난간에 손을 얹고 강을 향해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수풀을 쳐다봤다. 순간 우뚝 멈춰서지 않을수가 없었다. 익숙하리만큼 눈에 익은 까만색 머리통.


지민이었다.


허탈하고 어이가 없어서 아무말 못하고 그대로 터덜터덜 걸어 수풀로 향하는데 윤기가 다가오는 것을 눈치 채지도 못한건지 수풀 안에 있는 그는 자꾸만 더 깊게 들어갔다. 한숨을 푹 내쉬고 지민의 뒤에서 무얼 하는지 바라봤다. 대체 이 시간에, 수풀 속에는 왜 들어가 있는 건데.


금방이라도 울컥하고 튀어나올 것 같은 목소리를 억눌렀다.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너 잘못된 줄 알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지민을 바라보기도 잠시. 뒤이어 지민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여기 있을텐데..."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버릴 것만 같은 우울한 목소리로 주어나 목적어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고 있는 데다가 무얼 찾는지 아까부터 수풀 속을 뒤지고 있었다. 급하게 나온 티가 역력하게 나는 얇은 티셔츠 차림에, 장갑도 끼지 않은 손으로 수풀을 뒤져댔으니 당연히도 엉망이 되어있었다.


상처로 가득한 손이 눈에 들어오자 당장이라도 말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럴 수 없었다. 발이 그 자리에서 떨어지지가 않았다. 무얼 찾는 건지, 왜 아무말 없이 밖으로 나온건지. 물어보고 싶은 질문은 산더미인데. 점차 지민이 안으로 깊게 들어간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눈살을 찌푸리고 한 발, 한 발 따라 들어가자 이내 한참을 손으로 바닥을 더듬거리더니 주저 앉아서 한숨을 깊게 내쉬는 지민을 바라봤다. 이제는 강가에 거의 다달아서 깊게 들어갈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가자고 말을 걸어야 할 것 같아 입을 떼려고 하는 찰나에,


"혹시...강에 있나..."


벌떡 일어서더니 그는 신발과 양말을 벗어던졌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말릴 틈도 없었다. 무슨 짓을 하려고. 말릴 틈도 없이 지민은 오른 쪽 발을 차디찬 강물로 밀어넣었다.


"야!!!"


가만히 있으려는 생각도 없었고, 가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는데 이미 정신을 차렸을 때는 몸이 먼저 나서고 있었다. 단숨에 지민의 허리를 잡고 끌어당겨 강가로부터 빠져나오게 만들었다. 몇 초 쯤이 지나서야 놀랐던 가슴이 진정되어 덜컥 막혀오는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너 미쳤어?"

"유, 윤기씨...?"

"너 미쳤냐고 묻잖아!!!"


마주치는 얼굴은 생각보다 엉망이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물자국이 말라붙은 눈가며, 붉어진 볼과 코. 추워서인지 발갛게 달아오른 목과 손. 게다가 이미 손은 상처가 날대로 나버려서 찰과상과 베인 상처로 가득했다. 아플 것을 알기 때문에 차마 손을 세게 쥐지도 못하고 허리에 팔만 단단히 감은 채 무섭게 고함을 질렀는데 금세 다시 지민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여긴 왜 혼자와!!! 말을 하고 가던가!!! 내가 얼마나..."

"......"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기나 해?"

"......"


더 혼내주려고 했는데. 다시는 혼자 위험한 짓 못하게 하려고 더 혼내주려고 했는데. 혼을 내면 혼을 낼수록 뚝뚝 흐르는 지민의 눈물이 자꾸만 눈에 들어와서 관두기로 했다.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지민을 품에 꽉 안았다. 얼마나 서럽게 우는지 울음이 제대로 밖에 튀어나오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잘게 떨리는 몸이 안쓰러워 잠깐 지민을 떼어놓은 다음 져지를 벗어 어깨에 걸쳐주었다.


"말해봐, 여긴 왜 나왔어. 수풀에는 왜 들어간거고."

"...서..."

"뭐?"

"끕...잃어버려...잃어버려서..."


잃어버렸다고? 뭘? 주어와 목적어는 여전히 생략한 채 뚝뚝 끊어진 말을 해오는 지민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하고싶은 말이 많은 눈치인데 제대로 나오지 않아 본인도 답답한 표정이었다. 알아들을 수 있다면, 더 깊게, 더 쉽게 지민의 마음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좋을텐데.


"울지말고. 천천히. 나 어디 안가니까. 천천히 말해."

"윤기씨...끅...나...내가요...끕..."

"어."

"미, 미안해요...끅...진짜...진...진짜...너무 미안해요..."


연신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며 고개를 가로젓는 지민을 바라보다가 다정하게 손으로 얼굴을 맞잡으며 시선을 맞췄다. 마주치는 눈에는 한없이 눈물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왜. 뭐가 미안한데. 뭐가 미안한건데, 지민아."

"내가..."

"어. 듣고있어."

"바, 반지를..."

"응."

"잃어버렸어요."


그 말을 마치자마자 아까보다 배는 서럽게 꺽꺽대며 울기 시작하는 지민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눈물 콧물 가릴 것 없이 펑펑 우는데 뭐라 할 말도 없고. 반지를 잃어버려 찾으러 온 것이라면 모든 것이 들어맞았다. 아까 다리에서 야경을 볼 때만 해도 반지가 있었으니. 아마 본인도 이 곳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찾으러 온 것일 테니까.


"미, 미안해요...지짜...진짜 미안해요...끅..."

"......"

"나, 나 아는데에...끕...유, 윤기씨가 고민해서 준 거 아는데...소중한데...진짜 소중한데...처음 준 반지인데...끅..."


눈물은 그칠 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하염없이 서럽게 우는 지민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에 움찔하더니 더 크게 우는 것 같아 우는 얼굴을 쳐다보다 그대로 품에 꼭 안았다. 갑자기 안은 행동에 놀랐는지 잠시나마 울음소리가 멎더니 다시 이어졌다.


"박지민."

"끅..."

"나 봐."

"......"

"내 얼굴 안 볼거야?"


평소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되물었더니 얼굴을 안 보는 것은 또 싫은지 금세 고개를 도리도리 흔드는 것을 보고 피실 웃었다. 그래, 이래야지 박지민이지. 내가 아는 박지민.


"나 봐봐. 지민아."

"......"

"미안해."

"......"

"애초부터 반지 사이즈 맞게 줬으면 잃어버릴 일도 없었을텐데. 헐렁해서 너도 모르게 빠진 걸거야. 미안. 그렇게 사소한 것도 신경 써주지 못해서."

"......"

"너 울게 만들기나 하고."


손가락을 뻗어 지민의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


"너 다치게나 하고."


그러고서는 다른 한 손으로 지민의 손을 붙잡고서 입으로 가져가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움찔하기도 잠시 싫지는 않은지 가만히 있는 것을 보고 잠깐 감았던 눈을 떠 지민과 눈을 맞췄다.


"너 추운 밤에 돌아다니게나 하고."


시선을 맞추는 지민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품에 안았다. 추웠을텐데. 대체 언제부터 밖에 있었던 거야. 한참 차가운 몸이 닿자 그 한기가 느껴져 속이 한없이 무거워졌다. 더 일찍, 더 일찍 알아챘어야만 했다. 그렇게 했어야만 했다.


"너 아프게나 하고. 걱정하게나 하고. 미안한 점이 한가득이야."

"윤기씨...나는...나...나는...그게 아니라..."

"잃어버린 거 네 탓 아니야. 그러니까 자책하지도 말고. 미안해하지도 마."


그 말에도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며 시선을 회피하는 지민을 바라보고 있다가 잠시 지민에게 떨어져 왼손에 있던 반지를 바라봤다. 하나는 없어져 버렸고. 이제 커플링에는 의미가 없었다. 그럼에도 한없이 반짝거리는 그 금속 덩어리가 왠지 밉지만은 않아서. 바라보고 있다가 피실 웃었다.


"박지민."

"......"

"대답 안해?"

"네...?"

"똑바로 봐."


그 말을 마치고서는 왼손에서 반지를 빼냈다. 대체 무슨 짓을 할 것이냐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길래 의기양양하게 웃어보이며 그대로 반지를 강으로 던졌다.


"아!!!"


휙하고 가볍게 날아가버리는 반지에는 수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그것을 알기라도 하는지 잡으려고 손을 뻗는 지민을 제지하며 다시금 품에 안았다. 금세 퐁하고 빠져버리는 반지는 한없이 많은 추억들을 담고있는 무거운 기억들과는 상반되게 순식간에 물 속으로 잠식되어 눈에 보이지 않게 되어버렸다.


"뭐하는 거예요!!!"

"봐."

"......"

"제대로 나한테 화낼 줄도 알고. 의견 말할줄도 알잖아."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ㄹ..."


지민의 시선 끝은 반지가 빠져버린 강으로 향해있었다. 그 시선 끝이 자신이 아닌 것이 왠지 모르게 괘씸해 볼을 잡고 시선을 맞추게끔 얼굴을 돌렸다. 금세 마주치는 눈동자에는 왠지 모를 슬픔과 두려움이 가득차있다는 게 단번에 느껴져서 마음 한 켠이 시렸다.


"나 너랑 결혼할거야."

"......"


뜬금없는 고백 아닌 고백에 지민의 눈이 금세 커졌다.


"그 때도 반지 할 거고."

"......"

"그럼 그 때는 그 반지랑 커플링 중에 뭘 끼고 나가야 할지 항상 고민해야하잖아."

"......"

"그리고 예상했어. 너 잃어버리는 거. 항상 덜렁거리니까."

"......"


잠시 말을 멈춘 윤기는 지그시 지민을 바라봤다. 경청하고 있다는듯 한없이 자신만이 담긴 눈동자가 보기 좋아 입을 가까이해 속눈썹 위에 살며시 맞췄다.


"나중에 어딘지 모를 곳에서 잃어버리는 것보다,"

"......"

"나는 이 곳에 너와의 추억을 묻어두고 가고 싶어."

"...무슨..."

"생각해봐. 추억은 언젠가 되면 잊혀져. 그것도 기억이니까. 이런 건 너도 알잖아."

"......"

"러시아에 또 오자고 네가 그랬지."

"......"

"러시아에 올 때마다 나는 이곳에 너와 함께 들를거야. 그리고 러시아를 생각할 때마다,"

"......"

"하얀 눈이 가득한 거리를 떠올릴 때마다,"

"......"

"크리스마스 장식들로 가득한 예쁜 성당을 떠올릴 때마다,"

"......"

"나는 너와의 추억을 회상하게 될거야, 박지민."


그 말을 끝마치자 이미 지민의 눈에서는 왠지 모를 눈물이 다시 뚝뚝 흐르고 있었다.


"울라고 한 얘기 아닌데."


바람 빠진 웃음 소리를 내며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팔을 목에 감고 품에 안겨오는 것이 평소와는 달리 깊고 진해서, 뒤이어 윤기 또한 지민을 품 안에 깊게 껴안았다.


"그러니까 미안해 하지마."

"...그래도 미안해요."

"잃어버린 게 아니야. 그냥, 러시아의 이 아름다운 거리에 묻어뒀다고 치자."

"......"

"그러니까 그만 울어. 나 더이상 네가 우는 거 보기 싫어."


손을 뻗어 지민의 볼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살살 닦아냈다. 뒤이어 드러나는 붉으스름한 볼이 예뻐서. 손으로 다시 한번 지그시 눌렀다.


"...사랑해요."

"어?"

"사랑한다고요...진짜...나 진짜로...윤기씨를 사랑해요..."

"......"


울음이 가득담긴 목소리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천천히 내뱉는 말은 그 어느 때보다 간지러웠다. 그래서 더 소중했다. 얼마나 많이 생각하고 그 말을 내뱉었을지 충분히 알기에 고개를 내려 입술 위로 입술을 포갰다. 한참동안 질척거리며 혀를 섞고 나서야 겨우 입을 뗄 수 있었다.


"나도 사랑해."

"...윤기씨,"

"왜."

"...오늘 밤은 같이 있고 싶어요."



-



상처 투성이인 손에 따뜻한 물이 닿자 자연스럽게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야...!"


샤워기로 물을 틀다 말고 움찔하며 손을 움켜쥐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몇시간 째 수풀 속에서 손을 휘적였으니. 어찌 보면 이 정도로 끝나 다행이었다. 수압이 세지도 않고 적당히 나와 제법 기분이 좋았다. 그럼에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을수가 없었다.


샤워 후에 일어날 일들이 너무 명백해서. 심장이 쿵쿵거렸다. 게다가 이 곳은, 지민의 방도 아니고 다름 아닌 윤기의 방이니까. 그 덕일까. 샤워 하나에도, 모든 것이 새로운듯 떨려왔다. 그는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심장이 간질거릴만큼 떨렸다.


복숭아향이 나는 바디워시로 온 몸을 깨끗하게 닦고 혹여 이상한 냄새라도 날까 조심스럽게 머리까지 깨끗하게 감고서는 샤워기를 껐다. 순식간에 조용해지는 욕실 내부에 숨이 턱 막혔다. 몇 초 동안 멍하니 서있다가 한 발, 한 발 샤워 부스 밖으로 내딛었다.


물기를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샤워 가운을 걸치고서는 밖으로 나가는 문으로 손을 뻗었다. 뚝뚝 흐르는 물 따위를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부끄럽고, 창피하고, 혹시나 후에 나에게 질리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과 긴장이 밀려오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에게 너무나도 안기고 싶었다.


다정한 그 품에, 다정한 그 말투에, 한없이 안겨 그의 소유물이 되고 싶었다. 그가 아니면 안될 것 같았다. 오늘밤이 아니면 안될 것만 같았다. 덜컥 하고 문을 단숨에 열자 기다렸다는듯 그는 앉아있던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나 피실 웃어보였다.


"감기 걸려."

"...상관 없어요."


제법 당돌한 말투에 놀라지도 않는지 점점 가까이로 다가온 그는 물기에 잔뜩 젖은 지민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눈을 맞췄다.


"알아."


무슨 신호를 보낸 것도 아닌데 눈은 자연스레 감겼고 진한 키스가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서로를 급하게 갈구하며 침대까지 향하는 데에는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연스레 침대에 눕혀진 지민의 샤워 가운은 힘없이 금방 벗겨져 나갔고 둘은 금세 나체가 되었다.


침대 위는 온통 살색의 향연이었다. 그의 입술은 지민의 입술을 따라 내려가 목을 향했고, 가슴을 향했고, 배를 향했고, 허벅지를 향했고. 뒤이어 발로 향했다.


"아...발은..."

"싫어?"

"그게 아니라..."

"말해봐. 싫어?"


그렇게 다정하게 물으면 대답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눈을 질끈 감고 한 손으로 부드럽게 발을 매만져오는 손길을 느끼며 한마디 한마디를 힘겹게 내뱉었다.


"못생겨서..."

"발이?"

"네에..."


어릴 때부터 오랜기간 무용을 해온 탓에 발은 엉망이었다. 뭉퉁한데다가 잦은 연습으로 새로 생긴 뼈들이며, 틀어진 발 구조는 오래 전부터 콤플렉스였다. 그런 발이 혹시나 그의 눈에 미워보일까 걱정됐다. 어느 것 하나 그의 눈에 예뻐 보이고 싶었다.


"우리,"

"......"

"발도 커플이네."


그 말에 자연스레 눈이 그의 발로 향했다. 아. 그의 발도 피차일반이었다. 피겨 때문에 울퉁불퉁 못생겨진 발.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고서는 금세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그러니까, 괜찮아. 예뻐."


그는 다시 발을 매만지며 허벅지에 입을 맞췄다. 더이상 아찔해서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자세를 바꿔 위로 올라타는 윤기를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질척거리는 키스가 이어졌다.



-



"아...아흐...! 거기...응!!!"

"여기, 좋아?"


섹스가 처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처음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둘 다 서로가 처음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그의 기술은 예상을 넘어서서 훨씬 좋았고 그가 안으로 들어올 때마다 무엇에 씌이기라도 한듯 쾌감을 느꼈다.


"더...더...! 으흥...빨리...! 아...! 아...!!"


이미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안 봐도 한참 붉어져 있을 눈이 상상돼 눈이 절로 감겼다. 윤기는 추삽질을 하면서도 얼굴을 맞잡고 키스를 이어갔다. 덕분에 한 단계 더 야한 신음 소리는 그의 입으로 인해 먹혀들어갔다.


"하응! 좋아...! 아! 아흥!! 거기...! 아흣, 아, 하으"

"윽..."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의 것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더 확실하게 느껴졌다. 눈을 질끈 감으면 생생하게 느껴져 그마저도 못하겠고 눈을 뜨면 눈을 맞추며 바라보고 있는 윤기가 보여 그 또한 고역이었다. 어느 쪽을 선택하던 다 흥분이 돼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도 그대로 고역이었다. 처음 치르는 관계라 부드럽게 하고 넘어가려 했거늘, 속궁합이 맞는다는 게 실제로 존재하는 말인 듯 싶었다. 앞이 아찔했다. 세게 처올리면 처올릴수록 뜨겁게 달라붙는 내벽이 온전히 느껴져 더 빠르게, 더 세게 추삽질을 할수밖에 없었다.


"아! 나, 으흥...가, 갈 것 같, 아...! 하응...!!!"

"사랑해."

"아흑...!! 아응...!! 아, 아, 하읏!"

"윽...사랑해."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더 빠르게 처올리기 시작한 그 또한 지민이 사정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정했다. 따뜻한 액체가 뒤에서 퍼지는 것을 느끼며 숨을 헐떡였다. 숨이 가쁜데도, 이렇게 힘든데도. 더 원하는 것은 상대가 윤기이기 때문일까.


사정의 여운이 남아 아직 나가지도 못한 채 지민을 내려다 보고 있던 그는 얼굴을 내려 다시금 지민에게 깊게 입을 맞췄다. 진한 키스가 끝난 후에야 다시 얼굴을 떼 눈을 맞춘 그는 묘한 눈빛을 보며 지민의 허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나."

"......"

"후우, 이걸로 만족 못하는데."

"......"

"더 하게 해줄래?"

"...안된다고 하면,"

"......"

"안 할 것도 아니면서."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입술은 무섭게 달려들었다. 쉴 틈도 없이 윤기의 목에 팔을 감고 혀를 섞었다.


그렇게 둘은 밤새 함께 안개길을 걸었다.






JM BOTTOM/ONLY SUJ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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