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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 로테이션 24(完)

커튼을 두껍게 쳐놨음에도 불구하고 호텔 방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은 눈부셨다. 얼떨결에 들어온 빛 몇 조각이 끊임없이 지민을 깨우기라도 하듯 자꾸만 그의 눈으로 향했다. 어젯밤 대체 얼마 동안 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 행위에 떠올리자마자 얼굴이 붉어졌다.


윤기와 지민 모두 나체였다. 게다가 피곤해서인지 씻지도 않고 그대로 윤기의 품에 안겨 잠이 들었으니. 제정신이 들자마자 창피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의 가슴 속에 파묻고있던 얼굴을 들어 위를 바라봤다. 각이 선 얼굴, 그였다.


하얀 얼굴에 오똑 선 콧날과 턱선. 그를 보자마자, 사랑하는 사람을 보자마자, 어젯밤을 함께한 명백한 그 사람을 보자마자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나는 당신과 밤을 보내고서도 이렇게도 설레는데. 혹여 그는 다른 생각일까. 질렸을까 싶은 생각에 어딘가 모르게 걱정하는 마음이 자리잡았다.


그러면서도 너무 곤하게 잠들어있는 그 사람이 더 푹 잘 수 있도록 이 이상 움직이고 싶지는 않았다. 불면증이라고는 말 못하겠지만 평소 고된 연습 속에 얼마 자지도 못하고 얼음 위에서 날아다니기만을 반복했던 윤기에게 잠시나마 휴식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물거품이라도 되듯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눈을 떴다. 아직도 잠이 덜 깼는지 게슴츠레 뜬 눈을 부비더니 제 품에 안겨있는 지민을 보고 피실 웃었다. 덩달아 살풋 웃은 지민은 더 깊게 그에게 안겼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불안할 것 같아서.


"잘 잤어?"

"허리 아파요."

"많이?"


아프다고 하니 점짓 놀랜 기색이다. 어젯밤 쉴틈없이 달렸는데 허리가 멀쩡할 리 없었다. 자각하지도 못한 듯 그저 지민이 '아프다'라는 단어에만 시선이 집중된 윤기는 벌떡 일어나 허레벌떡 지민의 허리를 살폈다. 눈으로 봐봤자 티날리도 없는데 자꾸만 바라보는 눈빛에 괜히 낯부끄러워져서 고개를 휙 돌렸다.


"어떡하지. 그렇게 아파?"

"...몰라요."

"미안, 내가 제대로 자제했어야 했는데..."


금세 들려오는 시무룩한 목소리에 뭔가 싶어 고개를 돌려 보니까 눈꼬리가 축 처진 게 평소 보지 못했던 모습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윤기 또한 모든 것이 예뻐 보이고 싶었으니까. 지민과 결혼하고 싶었으니까. 평생을 같이 있고 싶었으니까.


사소한 것이 계기라도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윤기씨,"

"...어."

"좋았어요?"

"......"


좋았다고? 내가 지금 잘못 들었나. 시선을 돌려 지민을 바라보자 이미 볼은 붉어질대로 붉어져서는 입만 달싹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본질적인 질문을 이해하자면 좋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좋았던 건 정말 좋았으니까. 혹시나 꿈이 아닐까 싶어 몇 번이나 잠자리 새에 확인했다.


눈앞에 있는 것이 지민이 맞는지, 지금 밑에서 울고있는 사람이 지민이 맞는지. 혹여 꿈이면 그대로 없어져버릴 것 같아서, 부서져 버릴 것 같아서 두려웠다.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지민의 볼을 두어번 쓸어올리고서는 얼굴을 내려 눈가와 귓가에 차례대로 입을 맞췄다.


"좋았어."

"......"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아."


무슨 의미인지 단번에 알아차린 덕에 얼굴이 금세 빨개졌다. 심장이 더이상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쿵쿵거릴 때 쯤 그는 상체만 일으켰던 몸을 다시 눕혀 지민의 옆에 살며시 누웠다.


"나,"

"네?"

"팔베게 해주라."

"네???"

"싫어?"

"아, 아뇨...싫은 게 아니고..."

"그럼 해줘."


그렇게 지그시 쳐다보면 안 해줄수도 없었다. 조심스럽게 팔을 뻗자 그 위에 턱하니 머리를 얹고 시선을 맞춰 오는데 차마 피할수도 없고, 이래서 그가 팔베게를 해달라고 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둘 다 나체인데도 부끄럼이 없었다. 아까부터 그것보다 더 창피하고 부끄럽고 사랑스러운 말들이 그에게서 튀어나왔기 때문일까.


"박지민."

"...네?"

"너는 어땠어."

"아..."

"대답해봐."

"그게...저는..."


자꾸만 뜸을 들이는 지민 덕에 속이 답답했다. 어서 대답해줬으면 좋겠다고 자꾸만 마음속으로 독촉하고 있었다. 나와 함께한 밤이 좋았다고, 앞으로도 함께 있고 싶다고. 그렇게 말해줘야지만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꼭 그런 기분이 들었다. 조바심이 나서 입술만 깨물고 있는데 그 틈에 지민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

"......"

"내 모든 밤들이 당신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키스해도 돼?"


형식상 물은 질문이라는 것쯤은 알고있었다. 대답을 하기도 전에 달려들어 입술을 진하게 맞춘 그를 받아들이며 두 눈을 감았다.



-



"경기 내일인데 안 떨려요?"

"어. 하나도."


거짓말. 눈이 흔들리는데? 마지막이라고 그래도 링 위의 얼음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를 체크해보고 싶다며 오랜만에 스케이트 슈즈를 꺼내든 그는 긴장이 되는지 연신 쉼호흡을 내쉬었다. 경기 시작 전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떨리는 것을 보니 그간 지민이 인터넷에서 뒤져봤던 당일 날 영상 속에서는 대체 얼마나 떨었을지 짐작이 가지도 않았다.


여유롭게 웃으면서 아름답게 추던데. 그만큼 표정 관리를 하려면 대체 어느 정도까지 긴장을 안 한 척 해야한다는 거야. 적어도 자신에게 만큼은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우물쭈물 뒤에서만 이온 음료를 들고 기다리다 결국 손을 뻗어 그의 소매를 덥석 붙잡았다.


갑자기 느껴지는 손길에 선뜻 윤기가 고개를 돌리자 마주하는 것은 고개를 푹 숙인 지민의 정수리였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제대로 전해지지 않을 때 나오는 버릇같은 것이 눈 앞에 있자 피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몸을 돌리고 지민에게 다가갔다.


"왜. 할말있어?"


다정하게 물으며 머리를 두어번 쓰다듬자 웅얼거리며 말을 해왔다.


"...긴장되면 항상 말해주면 안돼요?"

"뭘?"

"나한테...나 지금 긴장하고 있다고....말해주세요..."

"......"


생각하지도 못한 말이었다. 긴장하고 있다고 말해달라니. 확실히 다른 경기에 비해 배로 긴장하고 있었다. 원래부터라면 경기에 긴장을 하는 편은 아니었다. 얼음 위에서 나노는 걸 즐겁게 여기기도 했고, 무엇보다 스파이럴이나 점프를 한 번 씩 뛸 때마다 황홀하게 취한듯한 표정을 짓는 관객을 보는 것이 제법 매료적인 일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경기는 떨렸다. 단순히 은퇴 경기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번 경기에는 수많은 것들이 걸려 있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정작 그 '수많은 것들'의 중심이 되어야할 지민은 긴장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해달라 하니 미칠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다 털어놓을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계획하고 있는 이것만큼은 반드시 비밀로 해서 성공하고 싶었다. 그래도 저런 얼굴로 저런 말을 해오면 잠자코 있을수가 없었다. 시무룩해져서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는 지민을 바라보다 고개를 내려 입과 코 위로 연신 입을 맞췄다.


"긴장하고 있다고 말해도 나 계속 멋진 남자로 네 기억속에 남는 건가."

"네?"

"긴장하는 남자, 안 멋있잖아."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때예요? 퉁하게 말하며 노려보는 지민 탓에 그저 입동굴을 드러내며 웃었다. 이렇게나마 지민과 말을 하면 긴장이 풀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 번 더 키스를 해주려던 찰나에 저만치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음은 민윤기 선수. 대기해주세요.'


아. 그 소리를 듣고 입고있던 져지의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렸다. 갔다올게, 입 모양으로 지민에게 말하며 스케이트 날에 채워뒀던 안전바를 벗겨 건넸다. 얌전히 안전바를 받아들며 아직도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쳐다보고있는 지민을 바라보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급하게 입술에 작은 키스를 하고 황급히 링 위로 향했다.


긴장을 했으면 했지, 그렇다고 해서 흐뜨러질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애초부터 흐뜨러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감정선을 표현하면 표현해야할 것이고, 완벽하게 해야한다면 완벽하게 해야했다. 노래가 나오지도 않는데 괜히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날아올랐다 떨어졌다를 반복했다.


그래봤자 먼저 공개를 할 수는 없었기에 기본적인 동작들을 체크할 수밖에 없었지만. 얼음 상태는 확실히 최상급이었다. 이 정도면 미끄러지거나 점프가 곧게 나가지 않는 등의 불상사는 없을 것 같고. 지민이 짜준 안무는 확실히 피겨 스케이터가 소화하기에는 다소 어렵고 복잡한 동작들이 많았으나 당연히 1등감이었다.


실수를 하지 않는다면 내일 1등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다. 적당히 몸을 놀리고서 링 밖으로 내려왔다. 스케이트 날에 붙은 얼음 조각들을 탈탈 털면서 정면을 바라보자 마주치는 것은 여전히 안전바를 두 손에 꼭 쥔 상태로 이 쪽을 쳐다보고있는 지민이었다.


얼음 근처라 더 추울텐데 대기실에 가서 기다리지 않고서. 그렇게 말하려다가 왠지 모르게 오늘은 같이 있고 싶어서 관두기로 했다. 대신, 다가가서 손에 쥐고있던 안전바를 뺏어들다시피 왼손에 쥐고 다른 한 손으로 지민의 손을 잡았다.


"차갑잖아. 장갑은?"

"아, 놓고 왔어요."

"미친다. 내가 들고 다니랬잖아."

"대신 윤기씨 손 잡았잖아요."


헤실헤실 웃으면서 그렇게 애교섞인 목소리로 말하면 이 쪽은 져줄수밖에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쉬며 빙상장 밖으로 향했다. 내일이 당장 경기인데 준비는 커녕, 애인과 노닥거리고 있으니. 아마 상대 국가 선수가 본다면 이를 부득부득 갈 광경인 것이 분명했지만.


상관 없었다. 그 쪽이 신경을 쓰던 말던 이 쪽은 원하는 것을 죄다 이룰테니까. 애인과의 완벽한 삶도. 빙상장 위에서 아름답게 날아오르는 것도.


금메달을 쟁취하는 것도.



-



"내가 경기 뛰는데 어째 선수보다 매니저가 더 긴장한 것 같다?"

"아, 몰라요!"


경기 당일, 되려 멀쩡한 윤기와는 달리 지민은 아침부터 일어나 하루종일 초긴장 상태였다. 물통을 떨어뜨리고서는 양말을 짝짝이로 신고 나오고. 그것도 모자라 멍하게 걷다가 벽에 부딪히고.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그런 행동들이 나오는 것은 단순히 자신이 담당하는 선수의 경기가 아니라 애인의 경기라는 복잡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탓할수도 없었다.


"나 잘하고 올테니까. 키스 앤 크라이 존에서 기다려."

"윤기씨!!!"


이름이 호명되고 빙상장으로 들어가려던 차에 지민은 두근거리고 떨리는 마음을 억누른 채 그의 손을 잡았다. 깜짝 놀라 우뚝 멈춰서기도 잠시, 평소에 보여주던 그 환한 웃음을 얼굴 한가득 띄우며 돌아본 그는 다정한 표정이었다.


"...잘하고 와요."

"안 그래도 그럴 예정이야."


장갑도 끼지 않은 맨 손으로 지민의 볼을 한 번 꼬집어 주고서는 씨익 웃어주는 그 미소에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됐다. 정장을 입은 모습을 보는 건 사실 처음인데, 얼음 위에서 입는 정장이라니, 뭔가 남들과는 다르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차가운 것이 그의 모습과 쏙 빼닮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의 정장 차림이 좋았다. 저 모습으로 뒤이어 얼음 위를 날아다닐 것이라니, 상상이 가지 않으면서도 매니저로서, 혹은 그의 애인으로서 마음이 뭉클해졌다. 가만히 있다가는 왈칵 울음이 터져버릴 것만 같아 급하게 키스 앤 크라이 존으로 향했다.


윤기의 순서는 마지막이라, 그의 경기가 종료된다면 모든 선수들의 순위가 뜰 차례였다. 저번 러시아 전지 훈련 때 봤던 스메노프가 현재 2위였고, 일본의 한 선수가 1위였다. 이 이상의 최고 기록을 깨지 못한다면 윤기는 1위를 차지할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콩닥거렸다.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면서, 제일 믿어줘야 한다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 한 켠이 불안해지는 것은 왜일까. 그가 혹여, 내가 과거 콩쿠르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쳤던 것처럼 큰 사고를 당하지 않을까. 그러다가 혹시 불행해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삶의 무력감을 느끼며 의미없는 세월을 보내게 되지는 않을까. 그런 걱정들이 자꾸만 솟아났다. 하지만 지민의 생각과는 달리 노래가 시작되자마자 얼음 위를 활부하는 그의 모습은 다른 말로 표현할 것 없이 그저 오로지,


"아름답다..."


아름다운 광경을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었다.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가 스파이럴을 돌고 여유로운 웃음을 띄우며 관객들을 매료시키는 그가 어느때보다 빛나 보였다. 내가 짜준 안무, 더이상 현대 무용을 할 수 없어 속상해 할 때 그럼 자신의 안무를 짜보라며 선뜻 말해줬던 그를 위해 짰던 안무.


죽을 힘을 다해 스케이트 기술을 익혔던 날들. 직접 해보지는 못해도 밤새 관련된 기술들을 찾아보고 안무와 노래에 맞는 기술명들을 짜 넣으며 혼자 설레고 혼자 힘들어서 소파에 지쳐 잠들던 그 날들이 오늘 한번에 날개를 달고 날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니 긴장되는 것은 윤기뿐만이 아니었다.


쉼호흡을 하며 의자에 앉아있어도, 노래가 중반까지 다가가도, 그가 멋지게 점프를 성공해도. 심장이 쿵쿵 거리는 것은 도저히 멈추지 않았다.


'아, 민윤기 선수!!! 3회전 플립인데요, 저번 경기 때는 한 번 실패했던 경험이 있었죠?'

'역시 승부욕의 대명사, 이번에는 제대로 성공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전매특허, 자신감 넘치는 도취된 미소가 나오네요. 오늘도 역시 실수 하나 없이 경기를 해나갑니다.'


분명히 커다란 소리로, 그것도 한국말로 중계가 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쪽 귀로 들어갔다 반대쪽 귀로 나오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쿵쿵 거리는 심장 소리가 자꾸만 귓가에 울려서일까. 다른 것을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부디 무대가 끝나도 그의 미소가 멈추지 않기를.


두 손을 꽉 쥐고 계속 해서 전광판과 그의 무대를 번갈아 봤다. 자신감이 넘처나는듯한 표정에 불안함이라고는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지만 혹여 잘못될까 자꾸만 걱정됐다. 하지만 지민의 걱정과는 달리 마지막에 가서도 동작들을 완벽히 수행해 나갔고 더군다나 감정 표현은 누가 뭐래도 1등이었다.


슬프고 냉혈한 부분에서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일관되게 차가웠으며, 신나고 달콤한 부분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듯 웃는 모습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러다 그가 링 위를 한 바퀴 돌고 키스 앤 크라이 존을 지나칠 때 쯤, 눈이 마주쳤다.


"아..."


씨익 웃는 그만의 쾌활한 미소가 눈에 들어오자 저도 모르게 같이 웃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도 분명 이 날을 기다렸으리라. 마지막 커다란 파트의 음악이 울리고 무대는 종료됐다. 헐떡거리는 숨을 억누르며 웃어보이는 그의 얼굴이 전광판 한 가득 띄워졌다.


그러나 쉬고있을 틈도 없었다. 곧장 결과 발표를 앞두고 있었고, 그의 점수가 공개된다면 모든 선수들의 순위가 결정되는 셈이었다. 이온 음료와 수건을 들고 헐레벌떡 뛰어갔다. 여전히 가쁜 숨이 진정되지 않는지 입을 달싹이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텀블러와 수건을 건넸다.


"오늘 무대, 최고였어요."

"...네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됐어."


방실방실 웃는 모습을 보고 덩달아 씨익 웃었다. 땀이 잔뜩 묻었고, 땀냄새가 날 것이 분명한데도 싫은 티 하나 없이 손을 뻗어 턱선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주는 지민을 보고 낮게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그 행동에도 역시, 그는 싫은 티 하나 내지 않았다.


"점수 발표 곧 있으면 나겠네요."

"그러네."

"이제 진짜 끝이다...아쉬운 느낌 안 들어요?"

"안 들어."


생각 외로 훨씬 단호하고 칼같은 그의 대답에 사뭇 놀랐다. 조금은 아쉬워할 줄 알았는데. 평생을 이를 위해 달려왔던 목표고, 이제 은퇴하는데. 아쉬운 느낌이 들지 않는다니. 입도 벙긋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자 그제서야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씨익 웃고서는 머리를 보듬어왔다.


"은퇴한다고 해서 끝 아니잖아."

"...그래도..."

"나 스케이트 계속 할거야."

"아..."

"경기에 안 나가는 것 뿐이지."


환하게 지어오는 미소가 좋았다. 그대로 정장 셔츠 깃을 당겨 깊게 키스해주고 싶었지만 뒤이어 경기장 내부에 크게 울리는 안내 방송 때문에 그러지도 못했다.


'결과 발표가 있겠습니다.'


그 소리에 흘긋 뒤로 돌아본 그는 머리에 얹고 있었던 손을 차차 떼며 턱을 부드럽게 쓸어올려줬다.


"갔다올게."


스케이트 날에 안전바를 꽂은 채 시상대 쪽으로 걸어가는 그를 바라보다가 살풋 웃었다. 신발도 갈아신지 않고서. 확실히 그는 순위에 집착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저 무대를 즐기면 됐고, 어릴 때부터 참가한 수많은 대회에서 1위를 휩쓸었기에 더이상 그 순위에 대해 굳이 받아야겠다는 강박관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반드시 1등을 해야했다. 그래야만 했다. 그렇게 해야지만 오늘 계획했던 어떤 일을 완수할 수 있었으니까.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로 대기하고있는 시상대 쪽으로 다가서자 처음보는 선수들도 제법 있었으나 대부분은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비싯 웃으며 그 사이에 서있다가 점수가 발표되기만을 기다렸다. 이상하게 오늘은 그 대기 시간이 유독 길게만 느껴졌다. 다른 선수들이 말을 걸어와도, 제법 젊은 선수인 것을 보아 이번에 새로 발탁된 국가 대표구나 싶어도, 줄곧 팬이었다는 말을 들어도. 그 어떤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애타는 속을 알기라도 하는지 뒤이어 전광판에 커다랗게 점수가 떴다. 258.12점. 순간 주위에 정적이 흐르는 듯 조용해지더니 뒤이어 커다란 함성소리가 커다란 경기장 안을 채웠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당황할 틈도 없이 점수를 믿지 못하고 있는데 곁에 있던 수많은 선수들이 다가와 윤기를 안고 위로 들어올리고 난리가 났다.


세계 신기록 갱신이었다. 깨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257.67의 세계 기록이 깨진 것이다. 기뻐할 틈도 없었고, 점수를 믿지 못해 얼떨떨해할 뿐이었다. 세계 기록 갱신이라니. 믿을수도 없는 기록이었다. 그러다가 몇 분이 지나서야 소리를 지르며 입에서 튀어나오는 갖은 욕을 참지 않고 내뱉었다.


우승이었다.



-



시상식에는 수많은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물론 메달을 획득한 것은 1위를 포함해 단 세 명 뿐이었지만. 그토록 미워하고 다가오지 않기를 바랐던 스메노프가 3위였다. 같은 시상대 위로 서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별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못마땅하고 냉혈한 표정으로 흘긋 노려보니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웃어오는 꼴을 보고 허, 하고 실소를 지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옛말을 알기라도 하는 것일까. 똑같이 웃어줄만한 베짱은 없었기에 그대로 고개를 휙 돌렸다.


어차피 은퇴 후에는 저 잘난 얼굴 보지도 못할텐데. 차라리 잘됐지. 신경 쓰지 않는 편이 신상에 더 좋았다. 찰칵 찰칵, 플래시 소리가 자꾸만 귓가에 울렸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한 가지, 저만치에서 두 손을 모은 채 웃으며 바라보고있는 지민이었다.


어서 빨리 가서 저 따뜻한 품에 안기고 싶었다.


'그럼 메달 수여식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환호 소리가 곳곳에서 울리고 1위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반짝거리는 금메달이 가까이로 다가왔다. 경기를 치루고 시상대에 오를 때마다 마주했던 항상 똑같은 메달 수여자가 오늘만큼은 달라 보였다. 덥수룩하게 기른 흰수염에 그렇다고 더럽게만은 보이지 않기 위해 차려입은 정장까지.


평소에 메달을 받을 때는 별 의미가 없었는데. 오늘만큼은 손을 뻗어 목에 걸어주기도 전에 메달을 만지작 거렸다. 씨익 웃으며 메달을 수여받기도 잠시, 목에 걸린 금색의 반짝이는 동그란 물체를 보고 하염없이 손에 꽉 쥐었다.


3위의 메달 증정식까지 완전히 끝난 다음에서야 반짝이는 가루들과 폭죽들이 터지기 시작했다. 이런 피날레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수상대에서 내려오자마자 퍼져울리는 카메라 셔터소리와 수많은 기자들의 질문 세례에 이도 저도 가지 못한 채 갇히게 되었다.


소심한 지민은 다가오지도 못하고 저만치에 서서 그저 입만 달싹이고 있었다. 내가 저럴 줄 알았어.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도 하나없이 곧장 밀치고 그 아이에게 다가섰다. 막상 앞으로 다가가니 이럴 줄은 몰랐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있는 것이 영락없이 기대하지 않았다는 얼굴이었다.


"유, 윤기씨...!"

"......"

"축하해요!!! 진짜...저는 윤기씨가 우승할 줄 알았어요."


신나게 말하며 그 자리에서 방방 뛰기까지 하는 것을 보고 피실 웃었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아까까지만 해도 서로 마주잡고있던 손에 손톱자국이 나있었다. 손을 뻗어 가만히 매만지다가 목에 걸고있던 메달을 빼서 손에 쥐었다.


주위에는 어느새 몰려든 기자들로 가득했고, 그저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 이 중에서 그 다음으로 내가 무슨 행동을 할지 예측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꿀꺽 침을 삼키며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 채 환하게 웃고있는 지민을 바라보다가 그 앞에서 무릎을 반 꿇었다.


"...윤기씨?"


순간 셔터가 잔뜩 터진 탓에 플래시로 눈이 아팠다. 그러나,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 따위는 없었다.


"나랑,"

"......"

"결혼하자. 박지민."


그와 동시에 손에 쥐고있던 메달을 지민쪽으로 건넸다. 속이 바싹바싹 타들어가 죽을 것만 같았다. 혹여나 거절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마음 때문에. 기자들 덕에 프로포즈는 세계 각국으로 방송 중이었고, 경기장 내부에 크게 울려퍼졌다.


그 탓에 순간 크게 들려오는 환호와 비명소리에 귀가 아려왔다.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아무 대답없이 멍하니 저를 바라보는 지민과 눈을 맞췄다. 괜히 애꿎은 아랫입술만 깨물었다.


"싫어?"

"......"

"매일 행복하게 해줄게. 울지 않게 해줄게."

"......"

"평생 사랑해줄게. 그러니까, 나랑 같이 살자."

"...윤기씨..."

"어?"


나 울 것 같아, 그 말과 동시에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푹 가려버리는 지민을 바라보다가 피실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녀석은 끝까지 손이 참 많이 가는 아이였다. 꿇었던 무릎을 천천히 일으켜 세우며 지민에게 다가갔다.


지민은 이미 프로포즈를 받았다는 그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머리가 핑핑 돌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프로포즈는 생각도 하지 못했고, 게다가 금메달이라니. 혹시 이걸 위해서 그동안 그렇게 죽도록 연습한 건가 싶어서 마음 한 켠이 시려왔다. 제가 짰던 안무, 그리고 그에 맞춰줬던 윤기.


함께 따낸 금메달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래서 더 뜻이 깊었다. 한참을 울먹거리는데 그가 다가와 얼굴에 얹어진 손에 부드럽게 자신의 손을 올려 입을 맞췄다.


"아...반칙이잖아요...이런 거...말해주지도 않고..."

"말해주면, 서프라이즈가 안되잖아."

"아니...그래도..."

"뚝. 그만. 


그만 울어. 그는 지민이 너무나도 좋아하는 하얗고 커다란 손으로 뚝뚝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아무 말 없이 그저 흐느끼는데 뒤이어 윤기가 다시 되물어왔다.


"말해봐. 나랑 결혼해줄거야?"

"...나는요,"

"어."

"사실 집안 청소도 잘 못하고, 덜렁거리고, 돈도 잘 안 아껴써요."

"응."

"아무 생각 없이 소중한 물건을 떨어뜨리기도 하고요, 자주 다치기도 해요."

"......"

"그런데...그래도..."

"......"

"나, 나...윤기씨랑 결혼해도...같이 살아도 돼요?"


그렇게 울 것 같은 표정 짓지 말라고 아까도 말했는데. 엄지 손가락으로 지민의 눈을 꾹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서는 고개를 내려 입을 맞췄다. 들려오는 환호 소리는 이미 귀에 들어오지 않은지 오래였다.


"나는,"

"......"

"사소하게 신경 써주는 것도 못하고, 눈치도 없고."

"......"

"너무 둔해서 가끔 네가 무슨 말을 하고싶은 건지 못 알아들을 수도 있어."

"......"

"요리도 제대로 못하고, 성격도 까다로워."

"......"

"그래서, 남은 삶을 너와 함께 하고싶어. 그래도 싫어?"


뭉클해지는 가슴에 윤기의 손을 잡고 그의 가슴을 탕탕 쳤다. 알면서. 이미 내 대답이 뭔지 알면서. 다 알고 그렇게 말하는 거면서. 입술을 앙다물며 그를 올려다봤다. 정말 좋아하는 눈빛. 다정한 눈빛. 항상 앞에서 보고싶은 저 눈빛.


오로지 나만이 담겼으면 좋겠는 저 눈빛. 그 눈빛 안에 온전히 제가 담겨있는 것을 바라보며 선뜻 먼저 발돋움을 해 가볍게 입을 맞췄다.


"싫을리가 없잖아요...나랑, 나랑 평생을 함께해 주세요."


누가 먼저 할 것 없이 서로의 입술을 찾아들었다.







그 동안 '오버 로테이션'을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후기]


으허어어어어어어어 드디어 완결이네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1화를 시작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완결이라니...잘 키운 아들내미 내보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싱숭생숭합니다...Q&A로 마무리 하도록 할게요



1. 오버 로테이션 소재가 너무 참신한데 대체 어디서 들고오시는 건가요?

-오버 로테이션은 사실 윤기가 피부도 굉장히 하얗고 뼈대도 굵잖아요...제가 평소에 남자 피겨를 너무너무 사랑하는데 윤기 그런 이미지가(살짝 겨울남자 느낌도 나곻ㅎㅎㅎㅎ)피겨에 딱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희희


2. 후에 번외편은 있을 예정인가요?

-어...혹시 원하시는 분들이 많으시다면 생각해보려고요!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음...일단 지민이가 중학교 시절에 딱 한 번 윤기를 우연히 만난 적이 있거든요(본인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것에 대한 스토리도 적어보고 싶고, 상견례하는 거라던가 그 둘의 결혼 생활을 적어보고 싶네요....부부싸움하는 것도 보고싶고...


3. 글을 왜그렇게 잘쓰시는거죠?!!! 팁 좀 전수해주세요

-앜ㅋㅋㅋㅋ일단 저를 글을 잘 쓰지 못하고요...예...그렇게 생각해주신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희희 일단 제가 감히...감히 글 쓰는 팁에 대해서 알려드릴 처지도 안되지만...장편 기준으로 말씀드릴게요! 먼저 스토리를 생각해두고 하시는 편이 편해요.


뭐...예를 들어서 나는 둘이 공원에서 만나서 중간에 이런 에피소드가 있고 마지막 결말은 다시 공원에서 프로포즈하는 걸로 마무리 하고 싶다 이런 거라던가...그렇게 해야 나중에 마무리 하기가 쉬워진답니다. 중간에 변경되는 내용도 분명 있겠지만ㅎㅎㅎㅎ


그리고 쓸 때 그 장면을 하나하나 떠올리면서 최대한 세세하게 묘사를 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예를 들면 그 날 윤기가 입은 옷이라던지, 피부라던지, 머리카락이 날린다던지 이런 것들이요


4. 마음에 드는 에피소드라던지 캐릭터 설정이라던지 호옥시 있나요???

-음...좋아하는 에피소드는 굳이 뽑자면 윤기가 고백하는 장면??? 그거 진짜 너무 많이 오랫동안 고민하면서 쓴 거라 가장 마음에 드네요...캐릭터 설정은 일단 윤기가 추위를 별로 타지 않는다는 것도 좋아하구여...존재 자체가 발ㄹ...(쿨럭) 지민이가 도중에 현대무용을 못하게 됐다는 설정도 좋아해요


그동안 오버로테 너무너무 많이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얼마 뒤에 소장본 일반입금이 시작되니까 많은 사랑 부탁드려요





JM BOTTOM/ONLY SUJ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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