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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빛 하늘 01

"Ladies and gentle men. This is your captain speaking. We will be taking off shortly."


기내에 익숙한 영어 방송이 울렸다. 지직 거리는 기계음과 분주하게 움직이는 승무원들. 이번 목적지는 프랑스 파리. 항상 기대해왔던 그 도시였다. 한국에서 파리까지의 비행 시간은 꽤 길다 보니 준비할 것들이 상당히 많았다. 


바싹 구운 고기가 든 기내식과 달달한 디저트가 든 통까지. 그것들을 한번에 나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복도를 왔다 갔다 하기도 잠시, 무거운 짐들을 한번에 나르며 낑낑대는 신입 승무원을 보고 빠르게 다가갔다.


"제가 들게요. 먼저 담요 준비해 주세요."


환하게 웃으면서 짐을 받아들자 돌아오는 것은 다시 밝은 웃음이었다. 이제 여자 승무원과 남자 승무원의 비율이 조금밖에 차이나지 않는 지금. 현재, 짐을 나르는 지민은 그다지 드물지 않은 남자 승무원이었다. 신입 승무원인 것은 지민 또한 차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몇 개월 더 빨리 비행을 시작했다는 이유로 조금 더 익숙해진 것은 말할 것이 없었다.


기내식을 전부 옮겨두고, 음료 서비스까지 체크한 다음 겨우 한숨을 돌렸다. 언제 봐도 이륙 전에 하는 준비들은 버거웠다. 꽉 끼는 유니폼을 입는 것도 그랬지만 준비하다가도 가끔 무언가를 물어오는 손님에게 웃음 가득한 얼굴로 대답해주는 것은 더 고역이었다.


입에 경련이 날 정도로 웃으니 비행을 하고 숙소로 돌아갈 때 쯤에는 입이 얼얼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비행 업무가 좋았다. 하늘을 난다는 것이, 그렇게나 기분 좋은 일인 줄은 몰랐으니까. 넥타이가 돌아갔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바르게 고치는데 저 중간에서 웅성거리고 있는 신입 무더기들을 발견했다.


"뭐해요? 음료 준비는 다 끝났어요?"


다정한 말투로 물으니 그 새 놀랐는지 움찔하는 그녀들은 이내 속닥거리는 말투로 지민에게 말을 건네왔다.


"대박이에요, 선배님."

"네?"

"이번에 비즈니스 석에 그 유명한 민윤기 대표님이 타신다잖아요!"


민윤기? 대표? 참 오랜만에 듣는 그 이름을 머릿속에서 꽤나 오랫동안 곱씹었다. 기억력이 나쁜 편은 아니지만. 좋은 편도 아니기에. 민윤기 대표라면 지민이 기억하기로는 S기업 대표임에 틀림없었다. 어린 나이에 거기까지 올라갔다는 것도 칭찬할 법 했지만 더 놀라운 점은.


"아 이러다가 눈에 들면 어떡해요..."

"뭐가요?"

"저 대표님 여자 관계 문란하기로 유명하단 말이에요..."


그렇게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는데 여자 혹은 남자와의 스캔들이 빈번하다는 것. 사실 말로만 대표님, 대표님 하고 들어봤지 지민도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가끔가다 항공 스케줄이 겹치면 탄다는 경우도 있었는데 승무원을 시작한지 1년도 채 안돼서 만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본인은 어차피 그래봤자 상관 없다는 느낌이었지만. 스캔들로 회사 이미지에 타격을 입기에는 이미 너무나도 거물급인 그 회사가 왠지 모르게 지민은 싫었다. 관계가 문란하다는 것도 싫었고, 이렇게 대표라는 사람이 오는 것 만으로도 금세 시끄러워지는 것이 싫었다.


게다가 더 싫었던 것은.


"아 씨...나 비즈니스 석 담당인데..."


기나 긴 파리까지의 여정을 담당할 비즈니스 석의 승무원이 본인이라는 점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이코노미 맡으라고 할 때 좋은 말로 잘 맡을걸. 단순히 관계가 복잡하니 골치 아플 것 같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그저 회사 대표니까 이래라 저래라 하는 점이 많을까 걱정이었지.


혹시 엄청 괴롭히는 거 아니야? 아니면 자른다던가. 그도 그럴 것이 이 항공사의 크나큰 대표도 어떻게 보면 S기업이니까. 잘근 잘근 손톱만 씹고 있는데 어느새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화들짝 놀라 돌아보자 그 누구도 아니고 익숙하리만큼 익숙한 김연우 기장이었다.


"아...기장님..."

"이륙 준비 안 해요? 콜 넣어도 답이 아무도 없길래 부기장한테 맡겨두고 일단 나왔습니다."


말은 그렇게 모든 승무원들에게 하면서 손은 한참 다정하게 지민의 어깨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화끈거리는 것 같은 느낌에 얼굴을 숙이며 붉혔다. 둘은 이제 막 썸을 타기 시작한 사이였다. 아직 그 누구도 고백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서로 좋아하는 것을 아는 것 같은 그런 사이랄까.


그가 좋은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다. 다정하고, 멋있고, 키도 크고, 잘생겼고, 게다가 능력도 있으니까. 기장이라는 직급에 제복을 입은 남자가 멋있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베시시 웃으면서 볼 한 쪽을 긁적일 쯤 그는 다른 승무원 모두에게 주의의 말을 당부하며 마지막으로 지민을 구석으로 이끌었다.


"지민씨."

"네...?"

"내일 시간되면 나랑 점심 안 할래요?"

"네?"


그의 뜬금 없는 데이트 신청에 눈이 휘동그레졌다. 지, 지금 뭐라고? 기장님이 나한테 밥 먹자고 한거야? 몇 마디의 말을 머릿속에서 되새기기도 전에 그는 그렇게도 지민이 좋아하는 환한 웃음을 띄우며 다시금 말을 걸어왔다.


"내가 살게요. 요새 고생도 많이 하고, 파리 일정이 길잖아요. 도착하자마자 호텔에서 한 끼. 어때요?"

"......"


솔직히 말해 고민해야하는 질문도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데이트 신청을 하는데 굳이 거절할 필요가 있나? 수줍게 웃으면서 고개를 두어번 끄덕이자 그는 손을 뻗어 지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서는 다시 조종실로 향했다. 어떻게 사람이 저리도 다정할까.


뜻 모를 환상에 사로잡혀 히죽 히죽 웃다가도 아직 정리해야할 업무가 남았다는 사실에 놀라 걸음을 돌렸다. 그래, 이번 일이 끝나면 기장님하고 밥도 먹고. 관계에 발전이 더 있을거야. 그 사실 한가지만으로도 힘을 내기에는 충분했다.


조금 더 있으면 이륙이었다.



-



이륙은 순조로웠다. 어느 사고 하나 없이 평소처럼 비행기는 하늘을 향해 날았고, 손님들에게 불만같은 것들은 터져나오지 않았으며 나르는 음료수들도 전부 성황리에 이루어졌다. 물론, 이코노미 석은. 사실상 평소에도 이코노미 석에서 터져나오는 일들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그만큼 피곤한 손님들은 중간까지 가기도 전에 영화를 보다 지쳐 잠들기 일수였고, 고작 해봤자 멀미약을 갖다달라는 말 뿐. 비즈니스 석을 담당한 지민의 일과와는 확연히 차이가 있었다. 괜히 비즈니스 석 담당을 말해가지고. 과거의 자신이 스스로도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입술만 짖이기며 샴페인을 와인잔에 따르고 그릇 위에 플레이팅을 할 때 쯤, 비즈니스 석으로 가는 복도가 웅성거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스를 장식하다 말고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아니나 다를까. 여자 승무원 여럿이 몰려 커튼 사이로 흘긋 흘긋 비즈니스 석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합니까? 그릇들은 다 날랐어요?"

"엄마야...!"


지민이 다가가자 놀랐는지 움찔하기도 잠시, 말을 걸어온 상대가 같은 항공사 승무원이라는 것에 안도했는지 한숨을 내쉬는 그들을 바라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비즈니스 석은 대체 왜. 설마 아까 온다는 그 대표님 때문에? 비즈니스 석의 음료는 음식들과 같이 나가는 편이라 아직까지도 지민은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젊고 얼굴도 제법 잘생겼다는 말을 들었지만.


"무슨 일 있어요?"

"그게요...신입이 민 대표님 정장에 와인을 쏟은 것 같아요...미쳤나봐, 진짜...!"

"아..."


흔히들 있는 '사고'였다. 비행기가 난기류로 흔들리건 뭘로 흔들리건 간에 진동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이에 익숙하지 않은 신입들은 곧잘 음료를 흘리곤 했으니까. 음료를 흘린 것도 문제였지만 더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상대가 민윤기라는 사실이었다.


그 일로 여자 승무원에게 어떻게 물고 늘어질지는. 그만 아는 사실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안을 살펴보니 뭐라 말하는 것 같긴 한데 신입은 그저 당황할 뿐이고. 이상한 말 하는 건 아니겠지? 이상하게 정의감에 불타올라 눈살을 찌푸리기도 잠시 뒤에 서있던 승무원들 사이에서는 자꾸만 말이 오갔다.


"설마 자르거나 그러지는 않겠죠?"

"자르는 걸로 끝나면 다행이지...이상한 곳으로 데려갈지 누가 알아? 민윤기인데."


그 말을 듣자마자 참을 새도 없었다. 커튼을 휙 걷어올리고 비즈니스 석으로 향하자 마주치는 것은 신입과의 시선이었다. 도와달라는 말이 담긴 두 눈을 거부하기에는 몇 개월 더 일찍 근무했다는 경험력이 너무나도 컸다. 입술을 꾹 다물고서 그 자리로 가자 눈에는 생각하지도 못한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새까만 머리는 본 적이 없을만큼 완전한 흑발에 그와는 대조되게 새하얀 피부가 너무나도 빛나는 사람. 왜 잘생겼다고 소문이 났는지 알 법한 외모였다. 와인이 튄 곳은 소매 부분으로 티도 잘 나지 않았지만 매뉴얼 상 사과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에.


갑자기 나타난 지민의 존재가 거슬리지만은 않은지 언뜻 입가에 웃음을 띄고있던 그가 입을 열기 전에 먼저 지민이 선수를 쳤다.


"그만 해주세요."

"...뭘 말하는 건지."


단호하게 말했건만 그는 듣는 기척도 없어 보였다. 입가에 씨익 웃음을 띄우고서는 턱을 괸 그의 시선이 지민을 향했다. 알고 있으면서도 뻔뻔스레 대답을 하지 않는 건가 싶어 우물쭈물 거리다가 기어이 입을 다시 열었다.


"저희 승무원 괴롭히는 거요...!"

"누가."

"......"

"내가?"


그 말을 하고도 스스로 어이 없었는지 실소를 지은 그는 고개를 잠시 숙였다가 들고서는 지민을 뚫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차마 보지도 못하고 눈을 피해버리는데 그것을 놓칠리 없는 그는 톡톡톡 손가락 끝으로 좌석 테이블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아무리 대표님이라고 하시더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으시잖아요. 넘으시면 안되죠."

"......"

"와인 한 번 흘렸다고 자르고...막, 이상한 곳 데려가구...!"

"잠깐만."

"......"

"말은 정정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데. 일단, 난 지금 아무말도 안 했어."


갑자기 들려오는 말에 눈이 휘동그레졌다. 그와 동시에 고개를 번쩍 든 지민은 아, 하고 입만 열었다 닫았다. 그의 말은 즉슨 자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김칫국부터 드링킹한 지민이 이상한 말을 했다는 것. 생각해보니 당연했다. 직접 들은 것은 하나도 없었거니와 모두 승무원들의 추측일 뿐이었다. 괜히 잘못 말했다는 것을 깨닫고 그의 말이 귓가에 맴돌다 못해 마음 속으로 푹 박힐 것만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대화를 들어보기라도 할 걸. 과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슨 말이 하고 싶을까. 하지도 않은 일로 그를 갑질하는 대표로 만들어 버렸으니, 불쾌할 법도 했다. 이러다가 잘리는 쪽은 내가 아닐까 싶어 심장이 괜스레 쿵쿵 뛰다가도 입술이 바싹 말라갔다.


발만 동동 구르는데 그 모습을 보고있던 윤기는 피실 웃더니 말을 건네왔다.


"지민이?"

"......"

"이름도 귀엽네."

"...네?"

"성격은 더 귀엽고."


예상하지도 못한 말에 얼굴을 번쩍 들었다. 잘못 들었나 싶다가도 능글맞은 미소를 얼굴 한가득 띄우며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와인잔을 입가로 가져가 한 모금 들이킨 그는 앉은 상태로 지민의 왼쪽 가슴에 달려있는 명찰을 매만졌다.


"여기 담당은 그 쪽인가?"

"...지금 상당히 무례하신데요."

"알아."


피식 웃으며 한 쪽에 서있던 여자 승무원에게 가봐도 좋다는 제스쳐를 취한 윤기는 말 없이 한참 동안 지민의 명찰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소문이 안 좋게 나긴 안 좋게 난 모양이었다. 처음 보는 승무원에게, 그것도 자신의 항공사 승무원에게, 그런 말을 듣게 될 줄로는 상상도 못했으니까.


스캔들로 휩싸인 한 가운데 서있는 것은 어떻게 보면 거짓 하나 없는 사실이었다. 여자 관계가 문란한 것도 사실이었고, 그 수많은 스캔들 중 거짓은 어느 것 하나 없었으니까. 사실상 스캔들이 많고 여자 관계가 문란하다기 보다는 그저 짧고 단순한 만남을 선호한다는 말이 어울릴 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어차피 몇 개월 가지도 못하고 헤어질 것. 짧게 만난다고 뭐가 달라지나. 스스로도 이런 말을 하기는 끌리지 않았지만 한 마디로 자신을 표현하자면 '베베 꼬였다.' 라는 말이 옳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쁘다면 한 번 만나보면 그만이었고, 귀엽다면 한 번 만나보면 끝이었다.


생각해 보니 이런 반응은 오랜만이었다. 곧이 곧대로 불쾌하다는 감정을 드러내며 꾸미는 것 하나 없이 제게 얼굴을 한가득 구겨오는 것이. 그저 대기업의 대표 자리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여자들이 달려들고, 하루동안 오는 연락들이 수만가지였다.


명찰을 만지던 손을 떼고서 나지막이 말했다


"파리 내려서 할 일 없으면 나랑 밥이라도 먹지?"

"밥이요? 제가 대표님이랑?"

"안되나?"


그 말에 살풋 웃더니 그는 휴대폰을 내밀었다.


"...뭐에요, 이게."

"번호. 달라고 하는 건데."

"......"

"주기 싫으면 주지 않아도 상관은 없지만."


어차피 그러지 않아도 다 알게 될테니까. 입가에 웃음을 띄며 말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말하는 것의 의미는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 지금 이 대표님 눈에 든거야?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썸을 타는 사람도 있었고, 그 사람은 앞에 있는 무레한 대표와는 달리 지적이고, 멋있고, 자상했으니까.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죄송한데, 선약이 있어서요."

"선약?"

"네, 그 쪽보다 훨씬 자상하고 멋있는 사람이요."


흐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하는 모습에 안심을 하다가도 뒤에 들려오는 그의 말에 화들짝 놀라기 바빴다.


"여기 기장 말하는 건지 물어보고 싶은데."

"네? 어, 어떻게 알았어요?"

"아까 얘기하고 있는 걸 봤거든. 꽤나 다정하게."


끝까지 잠겨있는 셔츠 단추를 툭하고 하나 풀더니 싱긋 웃어오는 모습을 보고 입만 앙다물었다. 대체 그건 또 언제 본거야. 무슨 말로, 어떻게 응변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한숨과 함께 애써 담담한 척을 하며 입을 열었다.


"맞다고 하면 어떻게 할래요?"

"지민이 네가 틀렸다고 하면 어떻게 할래?"

"그게 무슨..."

"어떻게 하던 간에."

"......"

"넌 언젠가 나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을거야. 가까운 시일 내에."


의미 심장한 웃음을 띄며 음식 플레이팅을 부탁한다는 그의 숨겨진 말뜻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비행 스케줄에 김연우 기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JM BOTTOM/ONLY SUJ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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