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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소 01

울려퍼지는 함성 소리. 조금은 날카로운 듯 보이나, 뒤이어 귀를 뚫는 듯 짓이기는 마이크 소리.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한국 최초로 정상급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래퍼라는 사실과 동시에 공연장을 한가득 채운 팬들을 보고 있자면 속 깊숙한 곳이 괜스레 아렸다.


"그럼, 마지막 곡 가볼까요?"


이 세상 모든 것이 전부 행복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지금만큼은.


행복했다.



-



"...그게 무슨 소리예요?"


모든 것은 사소한 말 한마디에서 시작된다고 했던가. 해외 투어를 돌고 온 후 오랜만이었던 국내 콘서트를 겨우 겨우 끝낸 그는 지친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냉수를 한 손에 든 채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푹신한 소파에 땀방울이 묻는다는 것은 원칙상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본인의 취향에는 걸맞지 않은 일이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목 밑으로 흘러내리는 게 땀인지, 아니면 지금 허겁지겁 마시고 있는 물인지 모를 정도로 한참동안 타들어가는 목을 축이고 나서야 정신이 번뜩 들었다. 몇 시간을 노래와 랩을 번갈아 한다고 정신이 나가 있었던 터라 방금까지 대기실에서 자신의 매니저라는 작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귀를 기울일 틈도 없었는데.


조금의 정신이 돌아온 후에 귓가에 박혀들어온 말은.


"...너 결혼해야 할 것 같다, 윤기야."


생각보다 몸 속을 관통하는 말이었다. 아, 인이어를 오래 끼고 있어서 이제는 헛소리가 다 들리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고 고개를 절레 절레 저어 보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죽도록 미안하고 또 미안했는지 자신과 몇 년을 함께했던 매니저 형은 그저 고개를 푹 숙인채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뭐야, 이거."

"......"

"오늘로 콘서트 다 끝났다고 지금 스텝들이랑 짜고 치는 거죠?"

"...윤기야."

"몰래 카메라. 뭐 그런 거지?"

"......"


들려오는 대답은.


"미안해."


단달마의 사과였다. 분명 온 몸의 뼈가 바스라질만큼 아픈데. 움직이면 이대로 죽을 것만 같이 아픈데. 상당한 충격을 먹어서일까, 몸은 자연스레 소파에서 일으켜지고 있었다. 한 병을 통째로 원샷을 해버린 탓에 생수통 밑바닥에 조금밖에 남지 않았던 물이 손에서 빠져나가며 그대로 바닥 카페트를 적셨고, 아까까지만 해도 마지막 콘서트를 축하하며 케이크라도 자르자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이미 자취를 감춘지 오래였다.


"S 대기업 알지?"

"......"

"얼마전부터 연예계 쪽 사업도 시작했잖아."

"......"

"아직 이 쪽에 대해서 모르니까...우리 소속사 쪽이랑 계약적인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것 같아."

"...그래서요."

"......"

"그래서 지금껏 내가 벌어다준 명예, 돈."

"......"

"그런 거 다 무시하고 나 팔아넘기겠다 이거잖아."

"윤기야, 그게 아니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몇 년을 함께 일하며 군소리 하지 않았던 윤기였다. 힘들어도 괜찮다고, 언젠가 빛이 볼 날이 있을 거라며 괜스레 웃고서 몇 날 며칠을 밤을 새며 작업을 하던 윤기였다. 겨우 겨우 세상에 떠서 팬들에게 둘러싸이며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도, 그 후에도, 앞으로 영원히.


가수로서 영원할 줄 알았던 윤기였다.


그랬기에 이 소식은 그 누구보다 자신에게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어느덧 눈에서는 뚝뚝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 바보같이. 찌찔하게. 힘들어도, 이제 울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더 이상 슬픈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머리가 핑글핑글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손을 들어올려서 마른 세수를 연신하며 고개를 내젓고 부정을 해봤으나, 후에 들려오는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S기업 둘째 아들이 있다고 하더라."

"......"

"사회에 잘 알려지지도 않았던 사실이라...이 발표가 세간에 나가게 되면 넌 그냥 평범하게 연애를 하고, 결혼에 골인했다는 인식이 박히게 될거야."

"......"

"사장님이...미안하대. 많이 미안하대, 윤기야..."

"......"

"돈도 원하는만큼 주고...앞으로...무리하게 곡같은 거 요구 안할테니까..."

"......"

"한번만 살려주라, 응...?"


회사가 얼마전부터 낌새가 이상하다는 사실 쯤은 느낄 수 있었다. 가진 가수라고는 나밖에 없으면서 뜬금없이 인테리어를 하지 않나, 더 많은 직원들을 채용하지 않나. 모든 것이 자신이 벌어온 돈 덕분이라고 생각하기에는 터무니 없는 금액이었고, 이제 슬슬 신인을 발굴할 때도 됐다 싶은 생각마저 들었지만.


"...형."

"......"

"이건 아니잖아..."

"......"

"아니잖아요...나...나..."


이러려고 음악을 시작한 게 아닌데. 이상하게 제 인생은 모든 것이 꼬여버린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하고 싶었던 일이 한번에 이뤄지는 경우도 없었고. 그렇게 어려운 음악을 시작해서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기까지도 어언 5년. 이제야 겨우, 이제야 겨우.


"살 것 같았는데..."


천사가 태양에 가까이 가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까먹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높이 날아오르면 날아오를수록 새하얗게 빛나는 날개가 새까맣게 타들어간다는 것도 모르고. 그런 것도 모르고. 지금껏 너무 힘차게 날아오느라 이제 더 이상 날 힘도 없다는 사실을.


아주 뒤늦게 깨달은 기분이었다.



-



우울했다. 전적으로 우울했다. 인터넷에 자신의 이름만 검색해도 수두룩하게 나오는 소식들은 죄다 결혼에 관련된 말 뿐. 아무 소식도 없던 사람이 갑자기 결혼을 한다고 하니 비범치 않게 생각하는 사람도 여럿 있는 모양이었으나, 평범하게 만나 지금까지 연애를 했다는 말을 듣고서 대부분은 그저 그렇게 수용하는 모양이었다.


팬들 여럿도 축하한다는 말이 많았고. 나이 30이 가까워 오는데도 아직까지 연애 소식 하나 없던 터라 가끔 걱정하곤 했으니까. 콘서트가 끝났다는 핑계로 회사나 작업실에 나가지도 않은지 어언 일주일이 넘었다. 공백기에도 이런 적은 단 한번도 없었는데. 쉬는 날에도 미디를 만지고 있어야만 뭔가 마음이 놓이는 것만 같은 허무맹랑한 망상에.


그는 한 손에 들린 편지 봉투 한 장을 바라보며 괜히 입술을 꾹 짓이겼다. 이미 바랠대로 바래버린 색감 탓에 본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세월도 세월인가."


벌써 6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한 편지였다. 태어나서 처음 받아본 팬레터. 신난 표정으로 제게 이 편지를 건네주던 매니저의 표정을 그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야! 너 팬레터 왔어! 라고 저보다 더 환한 얼굴로 한 손에는 빳빳한 편지 봉투를, 다른 한 손에는 항상 들고다니던 윤기의 스케줄 노트를 쥔 채로.


다 옛날 일이었다. 그 편지를 보고 용기를 얻어 더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게 된 것도. 그 후로도 똑같은 보라색 봉투에 같은 내용의 서문을 보내오는 그 팬도. 최근까지 받았던 수많은 편지들 중 유독 눈에 띄었던 그 보라색 편지.


'윤기씨는 달을 닮았어요.'


내가 달을 닮아? 처음 그 편지를 받고 생각했었던 것은 그 정도였다. 한 번 보내고 말겠지, 싶었던 그 팬이 보내는 보라색 편지에는 항상 자신이 달을 닮았다는 말로 첫 문장이 시작되고 있었다. 보내는 이도, 보내는 이의 주소도 어느 것 하나 적혀있지 않으면서 편지에는 한가득 자신을 칭찬하는 말들과 함께 항상 용기를 얻고 간다는 말, 그리고 항상 곁에 있어줘서 고맙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하얗다는 의미로 말한건가?"


아직까지도 의문인 점이 한가득이었다. 데뷔 때부터 꾸준히 한 달에 한 번쯤은 보라색 편지 봉투에 담긴 손편지를 보내오곤 했는데 정작 그 편지의 주인이 누군지는 모르고. 제 콘서트나 팬미팅을 보러 왔었는지도 알 턱이 없고. 실제로 만나기란 더 힘든 일이었으니까.


한 번, 음악을 관둘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돈은 돈대로 안 들어오지, 노래는 노래대로 안 써지지. 팬은 팬 대로 없으니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음악을 시작한 이후 혹여 목이 상할까 끊었던 담배에 손이 다시 가기도 했었다. 그럴 때, 도착했던 한 통의 보라색 편지.


그 편지에 응원을 받아 다시 일어날 힘을 얻을 수 있던 것이 바로 지금의 그인데.


그 사람은 결혼 소식을 듣고서 어떤 반응을 보일까?


기뻐해줄까? 드디어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라고. 혹은 어디선가 모르게 결혼을 축하하고 있을지도. 그것도 아니라면,


"...조금은 슬퍼해줄까?"


이런. 차마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다고 생각하니 귀끝이 홧홧했다. 되도 않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팬을 팬 그 이상의 사람으로 보면 안된다고 몇 번을 생각했는데. 둥글둥글한 글씨체를 이제는 외울만큼 봤건만. 모든 편지들을 모아놓는 통에 한가득 쌓여있는 보라색 편지는 이미 윤기의 손 때를 타서 누렇게 변한지 오래였다.


아무래도 최근 생각지도 못한 정략결혼의 주인공이 된다고 생각하니 어딘가 모르게 속이 공허해져서 그런 것일 거라고, 합리화를 해버렸다.


스스로 합리화라고 생각하면서 합리화를 해봤자 소용없는 걸 아는데도 그랬다.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으켜 손에 쥐고 있던 편지를 다시 곱게 접어 통에 넣고서는 서랍 안으로 밀어 넣었다. 어떻게 보면 다음번부터는 이 편지가 끊기는 것이 아닐까, 답지 않은 걱정들을 하며. 괜히 속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



"어떡해..."


미쳤어. 새어나올듯 말듯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강의실에 울렸다. 혹여 남들에게 들릴까 조곤조곤 말하는 찰나였으나 입을 꽉 틀어막은 채 아무리 액정 화면을 들여다봐도 몰려오는 뿌듯한 감정을 차마 치울 수는 없었다.


"뭐야, 너."


한참이나 화면을 들여다보며 실실 웃고있을 타이밍에 가만히 가방을 챙기던 태형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그에게로 다가섰다. 역시나가 사람잡지. 그의 어깨 너머로 흘긋 화면을 본 태형은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다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또 그 민윤기인지, 장윤지인지 그 사람 보냐?"

"아! 민윤기거든! 이름 똑바로 불러..."


성질하고는.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이내 이름을 틀리게 부르는 태형을 향해 소심하게 한마디를 내뱉고서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 바람에 움찔하고 물러선 태형은 중얼중얼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게 욕 몇 마디를 내뱉고서는 다시 짐을 챙길 뿐이었다.


몇 년 전인지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오래되었거늘, 자신의 가장 친구라는 작자인 태형은 그 오랜 세월이 지나가도록 '민윤기'라는 사람의 이름을 잘 외우지 못했다. 머리가 나빴으면 이 대학 들어오지도 못했을텐데. 그 점은 시간이 지나도록 미스테리 하나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곧 있으면 새로운 신곡으로 돌아오겠다던 라이브 방송이 불과 한 달 전에 이루어졌는데 몇 날 며칠을 날밤으로 지새며 그 노래가 언제 나올까 기대했던 그에게 일주일 전 터졌던 갑작스런 결혼 발표는 가히 충격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애 소식 한 번 들고 오지 않던 사람인데.


갑자기 결혼이라니 처음에는 당혹스럽기도, 눈물이 조금 나오기도 했지만. 그 사람이 행복하다면야 상관없었다. 그 후에도 꾸준히 음악을 할 테고, 충분히 행복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니까.


"야, 박지민. 너 늦게 챙기면 놓고 간다."

"아, 알았어...! 금방 갈테니까 기다려."


그런 지민에게 깜짝 선물이라며 올라온 콘서트 연습 영상은 잠깐이나마 숨통을 트이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그 덕에 또 태형에게 핀잔을 들었지만. 그는 지민이 이렇게 무언가 하나에 몰두한다는 것이 좋기도 하면서, 그 대상이 하나의 가수라는 것이 제법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가수가 뭐 어때서. 콘서트도 한 번 안가본 태형이 그만한 열기를 알 턱이 없었다. 굳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었지만. 책상 위에 펼쳐져있는 무거운 전공책을 한번에 쓸어서 가방에 담자 필통과 모든 것이 섞여서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그게 문제인가. 시간을 더 지체했다가는 정말 자신을 놔두고 먼저 가버릴 것만 같은 표정을 취하는 태형 덕에 걸음을 바삐했다.


집으로 가는 길만큼은 마냥 즐겁지 않았으나, 무서운 마녀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은 기분을 상쇄시켜줄만한 윤기의 노래와 친구 태형이 있었기에.


언제나처럼 견딜 수 있었다.



-



"조심히 들어가고."

"이제 안 데려다줘도 되는데..."

"또 무슨 일 일어나면 전화해. 갈테니까."

"...이제 안 그래. 너 집 방향도 정반대인데, 뭘 또..."

"고집 피우지 말고. 어서 들어가."


아까까지만 해도 졸지 않고 필기를 하던 태형은 크게 입을 벌리며 하품을 하는 시늉을 하며 손을 휘적였다. 들어가던 말던 나는 상관이 없다, 라는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도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다정한 건. 지민의 집안 사정을 전부 알고있는 유일한 외부인이기 때문일까.


집 방향은 서로가 정반대인 터라 이런식으로 강의를 마친 뒤 매일 지민을 바래다주면 족히 1시간은 집에 더 늦게 도착함에도 이런 식의 방식을 그가 매일 고수하는 것은 이유가 있었다.


"때리면 맞지만 말고. 알지?"

"...응."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려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태형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가끔가다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뒤돌아보는 태형을 마주할 때마다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줬으나, 이내 태형이 저만치로 사라져버리자 입가에 올랐던 웃음은 단숨에 바닥으로 곤두박칠쳤다.


"집 들어가기 싫다..."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장작 26년이라는 세월을 이 집에서 보냈음에도 항상 들어가기 전 느껴지는 스산한 기운은 적응되지 않았다. 불과 몇 년 되지 않은 그 일 때문에 더 그런 것일까. 알 수 없었지만 이번에도 가방끈을 꼭 쥐고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었다.


"너는 무슨 애가 이렇게 늦게 들어와!!!"


움찔. 몸은 단숨에 굳어들어갔다. 오늘은 좀 잠잠히 넘어가는가 싶었는데. 쓰러질 정도로 화려하게 큰 집에서 이렇게 큰 호통을 칠 거면 대체 뭐하러 마당까지 만들어 놓은 것인지. 애써 시선을 피하면서 한숨을 내쉬어 봤으나 지민의 앞에 자리한 여성의 목소리는 가라 앉을 기미가 없어 보였다.


화려한 보석 장신구들과 몸에 두른 숄은 누가 봐도 상류층의 사람이라는 인식을 갖게 만드는 차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사람은.


"...죄송합니다, 고모님."


S기업 회장의 둘째 부인이었으니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속으로 나오는 온갖 나쁜 말들을 꾹꾹 눌러 담았지만, 어떤 것이 그녀의 눈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지민의 팔을 세게 끌어당기려는 시늉을 하더니 이내 무언가 생각났는지 움찔하는 그의 표정을 보고 손을 금세 거뒀다.


"아 참. 지민아."

"...네?"


아. 이름같은 건 진즉에 까먹으신 줄 알았는데. 기억은 하고있네. 그런 저런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하면서 시선을 맞추는 와중에 괜히 심장이 쿵쿵 뛰었다. 26년간 살면서도 이렇게 다정한 말투로 무언가 말을 걸어온 적은 한번도 없었기에.


"일단 들어와서 앉아봐."


생애 생전 더럽다는 이유로 한번도 자신과 맞대면을 하지 않았던 고모님이 자신을, 그것도 평소에 귀빈을 모시는 소파에 앉히고서 비싼 홍차까지 내오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덫에 걸린 생쥐가 바로 이런 기분일까? 싶은 갖가지 생각까지 들고.


또 한 편으로는 그저 소파 하나에 앉았는데 그런 생각마저 들다니,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구나 싶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민은 지금껏 철저히 이 집안에서 존재를 부정 당했으니까. 맞고, 또 맞고. 몸이 부서져라 맞고. 그 덕에 몸에만 있는 흉터도 여럿이었지만.


이름을 날리면서 회사까지 인수 인계 받고 있는 자신의 사촌 형, 아니 더 똑바로 말하면 배가 다른 형인 박지훈과는 사묻 다른 삶이었다. S기업의 자제라고 하면 그만큼 금세 떠오르는 새시대의 얼굴. 정식 부인의 배에서 태어난 그 형과 달리 지민은.


"얘. 좀 품위있게 마실 수는 없니?"

"아, 그게..."

"천한 몸에서 태어난 티는 못 버려서."


회장과 모르는 여자의 하룻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었으니까. 이제 어머니라고 불러야할 사람도 죽은지 오래였지만. 가슴 속에 푹푹 박히는 말들을 그대로 받아내고 있자니 힘들었다.


"...하실 말씀 있으시면 하세요."

"아 그랬지."

"......"

"드디어 네가 우리 집안에 도움되는 날이 온 것 같아서."

"...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들고있던 홍차를 얌전히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과자를 집어들려던 지민은 그대로 고모의 다음 말을 듣고 입에 머금고 있던 홍차를 내뿜을 수밖에 없었다.


"민윤기라는 사람이랑 결혼을 좀 해줘야겠어."


순간 턱하고 목이 막히는 것이 어찌 호흡을 해야 하는지 방법을 까먹은 기분이었다. 연신 쿨럭쿨럭 기침을 하며 겨우겨우 휴지로 입을 막아버린 지민은 그런 상태를 신경 쓰지도 않는지 구구 절절 사정을 얘기하는 고모의 눈을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알지? 이번에 우리 기업이 연예계 쪽에도 발 들인거."

"......"

"지훈이가 그 쪽으로도 해보고 싶다잖아. 뭐, 그 애가 하고 싶다고 해서 잘 안된 건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런데요?"

"알다시피 우리가 지식이 적잖아. 그래서 요새 유명한 가수 쪽 소속사랑 계약을 좀 맺고 도움을 받기로 했어."

"...설마 그 상대가 민윤기라는 말을 하고 싶으신 건 아니죠?"

"왜 아니야?"


왜 항상 쓰디 쓴 예상은 빗나간 적이 없나. 그 말 한마디로 수천 개의 심장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 상대가 자신일 줄은 몰랐고. 평범한 연애 후 결혼에 골인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 소식이 거짓일 줄은 몰랐다.


그렇기에 충격이 더 컸다. 그 사람의 크나 큰 팬이었기에. 그 사람을 누구보다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기에.


"안돼요...! 그것만큼은 안돼요, 다른 건 무엇이든 다 할게요, 그러니까 결혼은...!"

"이미 계약서까지 작성된 상태야."

"네?"

"무를 수 없어. 그리고, 너 대신 지훈이를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좋게 생각해. 솔직히 말해서, 이제 내 눈치 안 보고 살아도 되는 기회잖아? 좋은 상대까지 정해준다는데."


울컥,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속이 미어 내려서 그 상태로 땅 속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은 참. 좋은 사람인데. 민윤기라는 사람은 참 열심히 살아왔는데, 죽도록 노력했는데. 힘들 때도 언제나 곁에 있어주면서, 이 집안 누군가가 자신을 깔봐도, 괴롭혀도. 그의 노래만큼은 내 곁에 있어줬는데.


그 사람의 행복을 망가뜨리는 사람이 최종적으로 자신이라는 생각에 모든 화살들이 심장으로 꽂히는 것만 같았다.


그 만큼은 행복해지길 바랐다. 결혼이 아니더라도, 하고 싶은 걸 하고 지내며 행복하길 바랐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은 지민에게 참.


달같은 사람이었기에.

JM BOTTOM/ONLY SUJ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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