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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소 03

사랑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결혼은 처음부터 끝까지 차가웠다. 대기업의 자제와 한창 뜨는 연예인의 결혼식에 돈이야 부족할 일이 없었던 터라, 예식장부터 시작해 입고있는 예복까지 모든 것이 최상급이었는데도, 환하게 빛나는 하얀 턱시도와는 달리 그의 눈에서는.


죽음의 냄새가 나고 있었다.


멍하고 텅 빈 눈빛. 연예인이 아니랄까봐 손님이라도 왔다가는 금세 환히 웃으며 악수를 받아내는 그 모습이 지민에게는 한 올 한 올 마음을 찔러오는 모든 것이었다. 옆에 앉아있기가 거북했다. 속이 니글니글 울렁거려서 이대로 있다가는 쓰러져 버릴 것만 같았다.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됐다. 간단하게 진행하자는 말과 달리, 그의 소속사와 S기업의 의견 대리를 맡고 있는 박지훈 이사의 의견에 따라 세간에는 누구보다 행복한 두 사람처럼 보여야 하기에 이렇게 돈을 많이 부어 놓고서는 뉴스에 아내 바보라고 실릴 '민윤기'의 이름을 이용하겠다는 심산이었다.


그것을 둘 다 모르는 사실은 아니었으나, 그는 계약서의 규정대로 아무말이 없었고, 지민은 결혼식 전날까지 울며불며 악을 쓰다가 눈이 부으면 사진이 잘 안나오니 그만하라며 얼음이 가득 담긴 비닐봉지를 받았을 뿐이었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미안했다.


웨딩 화보를 찍는다는 명분으로 여러번 만났었으나, 가까이 붙어서 셔터소리가 나도, 좀 더 가까이 붙어서 그의 목에 팔을 걸고 인위적인 사랑을 표현해봐도, 조금 더 가까이 붙어 키스를 해보라는 말에 망설이는 지민과 달리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차가운 입술을 부비는 그에게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로지 지민만이, 근 6년동안 팬이었던 지민만이 알아낼 수 있는 감정들이었다. 그는, 민윤기라는 사람은 진정 행복할 때 이런 표정을 내지 않았다. 흐리멍텅한 눈빛, 아무것도 담기지 않을 것만 같은 눈빛. 저 마음 깊은 곳에서 한가득 상처를 받은 눈빛.


그래서 였을까. 정작 한참 좋아하는 사람과 입을 맞췄는데도, 목각 인형에 입을 맞춘 기분이었다. 싸늘하게 마음은 식어내려, 더이상 그에게 해줄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지민에게 남은 감정은 오로지 순수한.


미안함 뿐이었다.


얼굴을 볼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만들었다. 분명, 자신의 인생도 송두리째 흔들리고 자유와 모든 것을 억압 당했으며 살면서 연애 한 번 안 해보고 강제로 누군가와 결혼을 당했지만 그에 대해서 불만을 가질만한 입장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원래부터 그런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었으니까. 어떻게 보면 살아가면서 생긴 모든 행복을 빼앗긴 저로서는 '민윤기'라는 사람의 노래를 듣는 것 조차 허용되지 않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노래를 들으면서 상처를 치유받고, 그의 노래를 들으면서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배우고.


그런 일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좋아하지 말걸. 이렇게 빼앗길 것을 알았다면. 결혼식 한다고 손에 꼈던 하얀색 장갑이 구깃구깃해질 정도로 세게 주먹을 쥐니 그 점이 의아한듯 옆에서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또 속절없이 말을 걸어왔다.


"불편한 거라도 있어?"

"아...그냥..."

"그럼 가만히 있지? 손님들 신경 쓰는데."


그는 쓸데없이 이런 와중에도 자상했다. 틱틱대고 끝으로는 마음에 안 든다는듯이 말해주고 있으나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를 배려해주는 능력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듯 싶었다. 아까도 무심결에 생수 병을 챙겨주는 것도 그렇고, 굳이 계약서 내용을 따르지 않은 채 웃음 하나 띄지 않아도 되는 것을 애써 연기까지 하며 웃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자상하면 자상할수록 마음이 썩어 문드러진다는 것을 모르고. 결혼식이 끝마쳐 질 때까지 그는 말없이 옆에 서서 곁을 지켰다. 세레나데가 울려퍼지고, 그의 친구랍시고 축가를 불러주러온 친구가 제법 달큰한 사랑 노래를 불러도 박수를 치는 와중에 공허한 마음은 숨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인생이 끝이 나버린 것만 같았다. 이제 더이상 취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번다고 해도 팬 싸인회는 꿈도 꾸지 못할 것이며, 웃으면서 손이나 한 번 잡고 팬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도 하지 못할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그런 자유를 빼앗긴 것, 하나 남은 행복을 빼앗긴 것. 어찌 보면 그것이 지민에게 주어진 시련이었다.


가장 큰 행복이 옆에 있음에도 행복할 수가 없었다. 양측에게 마이너스가 되는 관계. 애초부터 시작하지 말았어야 하는 관계. 한참 결혼식이 끝나고 지치고 노곤노곤한 몸을 이끈 채로 향한 곳은 주차장이었다. 당장 입주를 시작해야 기자들의 몰리는 관심을 그나마 끌 수 있다며 짐을 싸들고 오라는 말에 결혼식 당일날 기사에 실릴 사진 잘 나오게 전날부터 팩을 붙이랴 짐을 싸랴 바빴다.


그래봤자 자신의 방 안에 있는 전공 서적 몇 개와 옷 몇 가지들을 챙기니 동이 나버렸지만. 어릴 때부터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에 대해 고모님은 안 좋은 시선을 보냈다. 너 까짓게? 그런 분위기. 눈치가 빨랐으면 빨랐지, 없는 편은 아니었기에 지민도 그에 대해 수긍하며 사는 중이었다.


그래도 나름 모으면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큰 집구석에서 고작 자신의 짐을 챙겨봐야 캐리어 하나 정도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자 괜히 마음 한구석이 시렸다. 털어놓을 곳이 없으니 더 그랬다. 태형만 해도 그랬다. 오랫동안 곁을 지켜준 녀석이었는데 갑작스러운 결혼에 아무 말도 못하고 청첩장만 보내버렸으니.


평소에 후드 집업 하나만 걸친 채로 돌아다니던 모습과는 달리 말끔하게 빼입은 정장을 입고 결혼식장에 들어선 태형은 무언가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더니 그저 벌벌 떨고있는 지민의 어깨만 두어번 두들기고 말았다.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 미안했다.


평소에 지지를 그렇게 많이 해주던 사람에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다는 것, 진실을 전할 수 없다는 것은 꽤 괴로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아무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윤기에게도 피해가 가는 일이었기에. 더 큰 피해는 이제 주고 싶지 않았다.


미리 어느 정도의 짐을 옮겨둔 덕분인지 윤기의 트렁크에 짐을 실으며 흘긋 바라보자 그 또한 조그마한 캐리어만 담겨 있을 뿐, 그 이상의 물건들은 없었다. 끌고 온 차가 없다고 하니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으나 이내 흔쾌히 태워주겠다는 말을 한 그가 고마울 뿐이었다.


"S기업 자제가 차 하나도 없고."

"아...면허가...없어서..."


차에 타서 안전벨트를 하는 동안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가시 박힌 그 말투에 움찔하는 건 되려 지민의 쪽이었다.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하자 흥미롭다는 듯 엑셀을 밟으며 다시 말을 거는 그였다.


"그 나이 되도록 면허 하나 안 따두고 뭐했어?"

"...그러게요."


장난질도 유분수라는 표정. 그럴 법도 했다. 그에게는 자신이 그저 대기업에서 자란 화초처럼 보일테니까. 어느 정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대기업에서 자란 것도 맞고, 다 맞는데. 유일하게 틀린 점이 있다면 지민 자신은 화초라기 보다는, 화초 근처에 피어있는 잡초였으니까.


억세고 드세기만 한 게, 한 번 밟으면 금세 수그러드는 그런 잡초. 뽑아도 뽑아도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서 화초 옆에 달라붙는 집요한 잡초.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한 채 침만 꿀꺽 삼켰다. 행여 짐에 담아온 그의 앨범 하나하나가 들킬까봐 내심 마음이 불편했다.


들키면 뭐라고 하지. 오래전부터 팬이었어요? 그런 말을 했다가는 되려 불쾌할 모습이 보였다. 어찌됐던간에 그의 눈에 난 여전히 나쁜 놈이었고, 그런 말을 했다가는 고작 팬심 하나로 자기 인생 쫑내려 한거냐며 화를 낼테니까. 게다가 팬이었다면 더욱이 이런 짓을 하면 안되는 것이었고.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하나 싶었던 찰나 그의 정장 주머니에서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신호등에 걸리자 휴대폰을 꺼내들어 액정 화면을 확인하고서 그는 휴대폰을 뺨에 대고 어깨에 걸친 채 운전을 계속했다.


"어."

-윤기형 이제 공식적으로 유부남이네요.


휴대폰 속 음량이 커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차 안이 너무나도 고요해서일까. 전화 내용은 수화기를 너머 지민의 귀까지 꽂히는 중이었다. 그래봤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그렇지 뭐."

-결혼식 못 가서 미안해요. 청첩장 받았는데 내가 이번에 안무 짠다고 해외에 나와 있어서. 입국을 못 했어요.


목소리만 들어도 알 것 같았다. 그의 오래된 팬이라면 누구나 이름 한번쯤은 들어봤을법한 그의 친구 김남준. 언더 시절부터 함께해 노래도 가끔 콜라보 뛰었고, 잠시 동안이나마 같은 소속사에 있었던 터라 왕래가 잦다고 들었다.


그런 그의 절친으로부터 정략 결혼에 대한 축하를 받다니. 과연 그는 무슨 기분일까?


-아내 분은 예쁘세요?

"......"

-그래도 나 섭해요. 형 알고 지낸지 오래 됐는데 연애 한다는 말도 하나 안 해주고.

"...응."

-난 형이 연애 하는 거 상상이 안 가. 생애 생전 노래 하나밖에 모르던 사람이 이제 결혼까지 하고.

"......"

-그 정도로 사랑해서 그런 거겠죠?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목소리가 바싹 바싹 타들어가는 것이, 이대로면 손에 쥐고 있는 물을 다 마셔버릴 것만 같았지만 부자연스럽게 이런 상황에서 그런 짓을 할 수 있을리는 없었다. 그는 남준의 전화 내용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알 수 없이 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그래, 임마. 입국하면 얼굴 한 번 보자. 술 살게, 내가."


그러고서는 뚝 끊어지는 전화 소리. 어찌보면 이 길고 긴 여정이 생각보다 훨씬 길어지겠다는 생각. 나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상처를 그에게 주었구나, 하는 생각.


그런 생각이 많아졌다.



-



무슨 속셈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결혼을 한 후에 바라본 지민은 전혀 대기업의 자제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을 연이어 보였다. 무거운 캐리어를 낑낑대며 들고가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으나, 그래도 보통 이 상황까지 오면 상대를 이용해 먹으려고 들지 않나?


무엇이 자꾸 마음에 걸리는지 신혼집에 들어온 이후에도 신발부터 시작해 모든 것을 가지런하게 정리해두고, 사람 하나 지나다니지 않는 것처럼 말끔하게 집 상태를 유지하며 제가 들어오거나 거실을 왔다 갔다 거리면 화들짝 놀라 제 방안으로 숨듯이 들어가버리는 꼴이 어딘가 모르게 속이 뒤틀렸다.


그 커다란 대기업의 이사를 처음 만나봤을 때, 자신과 결혼할 지민이라는 사람도 똑같이 냉철하고 일처리가 빠릿빠릿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논리적이고, 사람이 들어갈 틈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는 그런 사람. 그래서 일부러 첫 만남 때 더 세게 나갔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이 못 견딜 것만 같아서. 그런데 실제로 만나고, 실제로 살펴보니 그도 그런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지훈과는 어찌보면 닮지 않은 외모에 축 처진 애처로운 눈망울. 누군가를 애처롭다고 생각하기에는 본인 처지도 만만치 않았지만 뭐. 사실인 걸 어떻게 하랴.


하루에도 몇 번을 저만치에서 바라보며 차마 무슨 말을 내뱉지도 못한 채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이는 지민의 모습을 꽤 여러번 봤다. 결혼 후에도 음악 작업을 핑계로 방이나 작업실에 처박혀 있는 경우가 많았고, 그럴 때마다 방문 근처에서 무언가 모르게 자꾸만 눈에 띄는 지민이 무슨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 그럴 때마다 지민의 손에는 어떻게 사온 것인지 제법 앙증맞은 모양의 주먹밥과 간식들이 들려있었다. 먹으라고 들고 온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여러번 주려고 시도를 하는 것은 같았는데. 사람을 한 번 미워하면 끝이 없다고 속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먼저 다가가서 받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이 가지를 않는다는 말이 옳은 표현이었다. 아무리 잘해주려고 노력을 해도 결국 태생이 다른 사람. 커나간 환경이 서로 다른 사람. 결국 맞물릴 수 없는 톱니바퀴였다. 그래서 더 쌀쌀맞게 굴었다. 이상하게, 오늘만 해도 그랬다.


"뭐야."


자세한 정보는 물어보지 않아서 몰랐지만 대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지민은 이제서야 마치고 들어온 것인지 아직도 갈아입지 않은 제법 낡은 니트를 몸에 걸친 채로 이번에도 역시 손에 한가득 간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제 방에 서성이고 있었다.


조금은 답답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눈에 띄지 않으면 될 일이지. 참다 참다 비트를 찍는 것에 집중이 안될만큼 신경 쓰이기 시작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열어 젖혔다. 갑작스레 열린 문에 당황했는지 움찔한 지민은 애써 제 시선을 피하는 것만 같았다.


"어...그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해."

"계속...밤 새는 것 같길래...밥도 안 먹고..."

"...그래서?"

"이거라도 먹으라고...조금 만들어 왔어요..."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갔다. 사실, 말을 정정해야할 부분이 있었다. '밤 새는 것 같길래'가 아니고. 밤을 새길래. 윤기 특유의 버릇이 있다는 사실을 지민은 알고 있었다. 음악이나 기타 작업에 몰두하면 누가 건들지 않는 한 밥도 먹지 않은 채 그 일에 연연한다는 것.


그래서 주위에서 말리는 경우도 허다하다는 것. 수도 없이 들어왔던 사실을 제 눈으로 확인하게 되자 속이 이상했다. 어쩌면 그래서 더 눈이 갔을지도 모른다. 연예인이라는 직업의 특성상 가뜩이나 잔근육만 남아 마른 몸인데, 굶었다가 상태라도 안 좋아지면 어쩌나 싶어서.


주먹밥을 열심히 만들어 놓고서도 자신이 말을 거는 바람에 되려 방해가 되면 어떡하나 싶은 마음에 가지를 못하고 제 방에 들어와 꾸역 꾸역 먹기를 반복한지 여러번. 둘은 결혼한지 일주일이 넘어가면서도 서로에게 진심이 담긴 말 한마디를 건네지 못했다.


한 쪽은 두려워서, 다른 한 쪽은 두렵긴 마찬가지였으나 이 상황이 밉고 싫어서. 그런 오만하고 가증스러운 이유 때문에 둘은 맞물리지 못했다. 윤기는 그 쟁반에 담긴 음식들을 보고 잠시 골똘히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내 손을 뻗어 그 쟁반을 받아들었다.


"잘 먹을게."


낮은 중저음의 감사 인사. 이상하게 그것만으로도 세상이 갑자기 환해지는 것만 같았다. 괜찮다고, 고마워할 필요가 없다고 덧붙이려는 찰나.


"근데 다음부터는 이런 거 안 해와도 돼. 귀찮으니까."


심장이 나락으로 떨어지는듯한 말을 그는 이내 덧붙였다.


"아..."

"괜한 일 안해도 되니까."

"...미안해요. 앞으로는 더 신경 쓸게요."


아직까지도 심장이 쿵쿵 뛰는 것만 같았다. 역시 괜히 가져온 건가. 결혼식을 핑계로 화려한 민트색이었던 머리를 새까만 색으로 염색한 그가 쟁반을 받아들고도 여전히 저를 뚫어져라 쳐다본다는 사실에 귀끝까지 빨개지는 기분이었다. 조금은 창피했다.


지금의 저는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내 닫히는 문을 보면서 괜스레 핑 눈물이 돌았다. 더 잘해주고 싶고, 더 무언가를 해주고 싶은데. 6년동안 그의 음악으로 위로를 한가득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줄 수 있는 것은 현저히 적은 제 자신이 또 미워졌다. 잠깐이나마 저 너머로 들여다봤던 그의 방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그 구석에는 팬레터를 모아놓은 것인지 갈색 박스의 상자가 여러개 놓여있었다.


시간이 될 때마다 위로를 받고 있다는 말을 적어 그에게 편지를 부치는 것이 지민의 유일한 낙이었는데. 이제는 그 마저도 허용되지 않는 걸까 싶어 속이 암담해졌다. 저 수많은 편지들 중에서, 민윤기라는 이름을 불러주는 저 수많은 편지들 중에서.


내 목소리가 묻혀버리는 것처럼, 그의 인생에서도 나라는 존재가 하나의 점이 되어 묻혀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 하나 안 났으면 좋겠다고.


지민은 그렇게 생각했다.



-



"...오늘도 없네."


웬일로 오랜만에 회사에 나오는 길이었다. 억지로 결혼을 시킨 것에는 화가 많이 나 있었는데 그럼에도 음악을 하려면 소속사의 힘이 필요했고, 어찌됐던 한 배를 탄 운명이었으니 거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프로듀서 형들을 만나서 곡 검토를 받아야 한다는 명분도 있었지만, 사실 이건 겉보기식 명분이고. 실제 목적은...


"안 왔어, 그 편지. 내가 너 그 편지 기다릴 것 같아서 결혼 소식 뜬 날부터 계속 살펴봤는데. 안 오더라."


보라색 편지. '달을 닮았다.'라고 적혀있는 그 보라색 편지. 윤기가 그 편지를 찾는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저만치에서 커피를 후룩 마시며 고개를 젓는 직원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가 속한 소속사의 직원이라면 윤기가 도가 지나칠 정도로 그 보라색 편지에 집착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데뷔 초반, 아주 힘들었던 시기부터 지금까지 거의 한 번을 빠뜨리지 않고 오는 편지였으니 그럴만 하면서도. 유독 힘든 일이 있고, 버티기 힘들 때마다 보라색 편지를 꺼내 품에 품고 한참이나 웅크리고 누워 있는 것이 그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이라는 것도 다들 알았다.


그런데 그 편지가 결혼 소식 이후 뚝 끊겨 버린 것이었다. 그 사실이 윤기에게 있어 얼마나 크나큰 충격일지 함부로 짐작할 수는 없었으나 아직도 믿기 힘든지 괜히 너털웃음을 지으며 팬레터 함을 열어보는 그의 손길이 제법 쓰라려 보였다.


결혼을 축하한다는 문구가 잔뜩 적힌 팬레터 사이에서 유독.


보라색은 보이지를 않았다.

JM BOTTOM/ONLY SUJ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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