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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소 04

"야, 됐고. 어서 말해봐."

"어?"


조용한 침묵이 감돌던 둘 사이에서 그저 어색한 웃음소리만 내던 지민에게 태형은 한참이나 무언가 불만이 있는듯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을 건넸다. 이상하게, 평소와 달리 그는 지민을 한참이나 당황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결혼을 한지 이제는 한달 정도 됐나. 소문이 났으면 났고, 그렇다고 해서 지민에게는 많은 관심이 쏠리지도 않는 지금. 강의까지 꼬박꼬박 나오고 딱히 힘든 티는 하나 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며칠 전부터 태형은 제게 말을 잘 걸지 않았다.


폭력을 휘두르는 고모님의 집에 가지 않고, 곧장 신혼집에 가서 잘 지낸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어깨를 으쓱하고선 결국 지하철 역까지 데려다줄 뿐이었고. 어딘가 불편한 사람처럼 연이어 지민만을 뚫어져라 바라볼 때도 있었다. 딱히, 다른 감정이 있어서 그러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것이 어떻게 보면 참다가 이제서야 터진 것일지도 모른다고 지민은 생각했다. 커피를 한 잔 사줄테니 얘기 좀 하자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짠돌이 김태형이 웬일로 커피를 산다고 말한다 싶었더니 데려간 곳은 카페가 아닌 캠퍼스 뒤쪽의 조용한 교정.


그것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제게 지금 막 뽑았는지 물방울이 맺혀있는 차가운 캔커피를 건네며 태형은 제게 여러모로 불안하고 대답하기 힘든 질문을 퍼부었다.


"결혼, 억지로 한거잖아. 너."

"...무, 무슨 소리야! 그런 거 아니야."


녀석은 이런 곳은 이상할 만큼이나 눈치가 빨랐다. 차마 캔을 따지 못하고 타닥 타닥 손톱으로 뚜껑을 들었다 놨다만 반복하는 지민을 바라본 그는 자신의 커피를 따서 후룩 한 모금 마시더니 입을 달싹이다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널 본 게 몇 년이냐."

"......"

"거짓말은 드럽게 못해요. 야, 기억나냐? 우리 아이스크림 하나 몰래 먹어보겠다고 점심시간에 담 넘다가 걸렸는데 네가 거짓말 제대로 못해서 우리 둘 다 벌 섰잖아."

"그 얘기가 왜 나와..."


그러고보니 어렴풋하게 생각난다. 아니, 조금 더 선명하게. 고모님의 시선에서 못 벗어나 소심하고 나약한 상태로 있었던 지민과는 달리 하고 싶은 건 무조건 해야했던 직설적인 성격의 태형은 교복 입고 땡땡이 못 쳐보면 언제 또 나가보냐며 망설이는 제 손을 이끌고 담을 넘었다.


넘긴 넘었는데, 서툴러서 탈이지. 결국 선생님들께 들켜버렸고 반성문 몇 장을 쓰고 벌을 섰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와중에 김태형이라는 인간은 나름 생각이 있어서 제발 지민이의 보호자에게는 알리지 말아달라고 몇 번이고 찾아가 무릎을 꿇고 빈 덕에 웬 담을 넘었냐는 핑계로 뺨을 맞을 일은 다행히도 없었다.


"그러니까. 나한테 거짓말 치려고 하지 말라는 말이지."

"내가 언제...거짓말을 했다고."

"지금도 하잖아."

"안해!"


그만 발끈해서 입을 삐죽 내밀고 말았다. 속은 자꾸만 타들어가는 것 같은데. 태형은 물러설 기미가 없어 보이고.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싶자니 이미 기댄 것이 많은데 더 기댔다가는 민폐가 될 것 같고. 그럼에도 태형 말고는 털어놓을 곳이 없어 골머리를 썩히는 중이었다.


"없는 머리 굴릴 생각 하지마라."

"아니...!"

"네가 진짜 민윤기랑 결혼 했으면 지금 나랑 이러고 있었겠냐?"

"......"

"좋아 죽어서 수업 마치자 마자 집으로 달려갔을 녀석이."

"......"

"민윤기 그 자식, 난 원래 별로 마음에 안 들었어."

"야!!!"

"사람 차갑게 생겼잖아."

"안 차가워!!!"


너 그렇게 대하는 사람이 뭐가 좋다고. 지민에게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린 태형은 남아있던 커피를 단숨에 들이키고서는 캔을 구겨 쓰레기통을 향해 던졌다. 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단숨에 들어간 것이 기분이 좋았다.


눈치가 빠르다고 해서, 이것이 지민의 뜻대로 원해 성사된 결혼이 아닐 것이라는 의심을 쉽사리 품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되도록 소중한 친구가 행복하길 바랐고, 자신의 의심이 사실이 아니길 바랐고, 지금껏 사랑 한 번 못 받아본 만큼 민윤기라는 인간에게는 듬뿍 사랑을 받길 바랐다.


그래서 뜬금없이 날아온 청첩장에도 일부러 아무 말을 보내지 않았다. 문자라도 하나 보냈다가는 울컥 울컥 터져나올 것 같은 녀석의 감정 상태가 눈앞에 선한 것 같아서. 항상 괜찮은 '척'을 하는데 익숙해진 녀석이었다. 제발 자신의 예상이 빗나갔으면 하고 바랐을 뿐.


그런데 결혼식 당일, 예상이 현실이 되버린 일을 목격했으니 더이상 할 말이 없었다. 주차장에서 지민에게 함부로 대하는 그의 모습을 두 눈으로 봐버렸기 때문에 그 민윤기라는 작자를 미워할 수 밖에 없었다. 아까 대기실에서 결혼 축하한다고 말 한 마디 못 해준 것이 걸려 수소문 끝에 그 둘을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건만.


마주하게 된 것은 쌀쌀맞게 대우하는 윤기와 그것을 또 가만히 받아주며 눈치나 보고 있는 제 친구 박지민. 순간 속에서 열불이 나는 것만 같았다. 가서 한 마디라도 해줘야 하나? 주먹이 먼저 날아가면 어떡하지? 저 녀석은, 저 녀석은 뭔데.


뭔데 자기만 상처 받은 척을 하고 있어?


지민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한 '민윤기'라는 작자는 생각보다 태형에게 있어 그저 친구를 상처 입히는 존재였다. 대충 이 가증스러운 결혼의 서막을 알게 되었을 때, 아 전부 다 거짓이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지민이 받을 상처가 얼마나 컸을지부터 머릿속에 각인됐다.


어릴 때부터 갖은 고생을 다 하고 자란 아이였다. 누군가에게 제 의견 하나 말하기 힘들어 웃는 것 조차 버거워하던 아이였다. 몇 년을 함께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전공책을 안 가져왔으니 같이 보면 안되겠냐는 말을 몇 번이나 망설이며, 입을 달싹이며 하는 아이였다.


그랬기에 그 녀석이 미웠다. 민윤기라는 사람이 미웠다.


자신만 혼자 상처 받은 척, 어딘가 모르게 고독한 척 하는게 사람의 속을 건들였다. 박지민이 어디가 아쉬워서 그런 녀석이랑 결혼을 해? 물론 지민에게 선한 영향력을 지금까지 끼쳐준 사실에 대해 고마움이 없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상처를 지민에게 주었을 때.


태형은 그저 그 사람이 미웠다.



-



"시발."


욕짓거리가 작업실에 울려 퍼졌다. 동시에 쿵, 하고 무언가를 내리 찍는 소리도. 모든 것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박자를 찍는 기계에서는 그가 손을 뗀 지 오래이거늘, 여전히 띡 띡 일정한 박자 소리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결혼 후에도 나는 잘 산다, 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새로운 음악이나 만들까 싶었는데.


보라색 편지가 오지를 않다니, 이상하게 그 사실 한 가지 만으로도 온 몸이 옥죄어 오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나름 잊어 보려고 노력을 했다. 꾸준히 오던 편지가 가끔 뚝 끊기는 것은 있는 일이었고, 한 팬이 계속 나를 좋아해주기를 바라는 건 굉장히 오만한 생각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마음 한 구석에 깊게 박힌 상처를 어떻게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쓰고 있던 헤드셋을 빼고 미디 옆에 놔두고서는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두 눈을 감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 사람은. 항상 내 음악에게 많은 에너지를 받고 간다고, 감사하다고. 하나같이 좋은 말만 적어주던 그 사람은.


결혼 소식을 듣고 실망한 것일까? 내게 정이 뚝 떨어진 것일까? 그만큼의 신뢰를 보여주던 사람에게 나는 그 만큼의 신뢰를 주지 못했으니까. 기댈 곳이 없어진 사람의 몰골은 초라했다. 무엇인가를 계속 갈망하는듯한 눈에 휩싸여서 순식간에 그 화를 남에게 풀어버리니 그것도 문제고.


오늘 아침만 해도 그랬다. 일찍 나설 것이라며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언제부터 일어나 준비를 한 것인지 푹 끓여놓은 백숙이 두 눈 앞에 아른 거렸다. 앞치마를 한 상태로 다시 눈치를 보며 먹고 가라는 말을 하는 지민에게 차가운 말을 되려 내뱉어 버렸다.


'너나 먹어.'


이 정도 되면 화를 낼 법도 한데. 나는 그 아이의 인내력을 시험이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이렇게 건드려도, 저렇게 건드려도 그 아이는 단 한 번도 짜증을 부린 적이 없었다. 그렇게 자라라고 교육을 받아온 것도 아닐텐데. 지민의 친척만 봐도 그랬다.


자신보다 한 살인가, 어렸던가. 그럼에도 계약서 세부 항목을 작성하는데 누구 하나를 뚫어버릴 것처럼 곧은 눈매로 하나 하나 조목 조목 따져가는 것이. 지민과는 정 반대의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누구나 그런 것이 당연한 항목이었다.


더러운 짓은 지독할만큼 판을 치는 세상. 그 더럽고도 추악한 세상에 마음을 놔버린다면 그 이후로 끝이었다, 정말 끝. 그런 세상에서 똑같이 살아왔을 지민은 어딘가 모르게 풀이 죽은 토끼를 닮았다. 저만치에서 저를 바라보며 깡총 깡총 뛰어오다가도 뒤돌아서 눈이 마주치면 금세 도망가 버리는.


자신을 신경 써주는 것이 느껴져서 더 눈에 거슬렸다. 차라리, 나쁜 놈이라고 욕이라도 해주지...


"...난 그렇게 착한 놈이 아닌데."


지민은 저에게 항상 무언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믿어요, 라고 말하고 싶은 건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러고 보니 아침 동안의 끓인 백숙은 어떻게 됐을까. 따로 조사를 한 것인지 뭔지. 이 맘 때 쯤이면 백숙을 먹고 싶어한다는 제 마음을 아는 듯 싶었다.


아.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어서 곡이나 써야지.



-



"다...버려야겠네."


부엌에 서서 혼자 중얼 중얼 웃고 말았다. 그래도 웃음이 나왔다.


'너나 먹어.'


아직까지는 그래도 저렇게 대꾸할 힘이라도 있는 것 같아서. 정말 저 사람이 무너져 버리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에 밤 잠을 뒤설친 게 여러번이었다. 결혼한지 조금의 시간이 지난 지금, 윤기는 윤기 나름대로의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여전히 밤이면 집에 돌아와 미디를 만졌으며 밥을 먹지 않으면 주먹밥을 싸온다는 지민의 뜻을 알아챈 것인지 나름대로 밥까지 열심히 챙겨 먹었다.


덕분에 살 빠졌던 모습이 다시금 조금쯤은 살이 오른 몸으로 바뀌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쿵쿵 거리던 심장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의 물건들을 함부로 만지고 싶지는 않았으나, 버릇인 건지 뭔지 가끔가다 벗어둔 채로 세탁기에 넣어두지도 않은 트레이닝복을 보고 있자면 한숨이 나왔다.


"저번 라이브 때 아끼던 바지라고 했으면서...이렇게 막 두면 옷 다 상하잖아."


주섬 주섬 주워서 세탁기에 곱게 넣어두는 것도 지민의 일과 중 하나였다. 레포트를 쓴 후에 몰려오는 졸음을 참고 약 4시간의 잠을 잔 후, 새벽부터 일어나 차려둔 백숙을 먹지 않고 그대로 나갔다는 점은 조금은 속상했지만. 나름 맛있게 된 것 같으니 혹여라도 밤 늦게 퇴근한 그가 배가 고플 때를 대비해 남겨 두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혼자서 밥을 차려먹는 일은 이제 익숙해진 일과였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소리나게 밥을 먹지 말라는 잔소리를 할 고모님도 없고, 그를 감시 카메라처럼 관찰하고 있다가 문자로 고모님께 일과 하나하나를 보고하는 가정부도 없다는 것. 조금은 숨통이 트이면서도 아직까지 나는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살아야 한다는 점이 아쉬웠다.


이도 운명이라면 거부할 수 없겠지만.


"잘 먹겠습니다."


넓은 테이블에 마주 앉은 사람 하나 없이 홀로 앉아 환하게 웃으며 밥과 국물을 떠먹었다. 맛있는데, 너무 맛있는데. 이상하게 왜 자꾸만 눈물이 날 것 같은지. 그의 노래가 나온다면, 이번에 새로 쓴 노래가 나온다면. 난 뭐라고 해야 하지? 좋았어요? 한 번 들어볼게요. 이런 말들을 내뱉으며 팬 아닌 팬인 척을 하고.


그에게서 경멸하는듯한 시선이 나온다면, 난 어떻게 해야하지.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거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감기 옮았나."


조별 과제를 하는 아이 중에서 심한 독감에 걸렸다고 말한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거의 하루 종일 붙어있다 보니 그 기운이 조금 옮았나 보다. 하긴, 요새 일찍 일어나는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면역력은 바닥을 치는 상태였고. 혹시 같은 집에서 생활하는 그에게 옮을까봐 일찍이 병원을 다녀와야 겠다고 생각했다.


열 기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



작업이 아예 진행되지를 않아서 대놓고 딴 짓을 하기 시작했다. 작업해둔 비트를 다시 들어보자니 무슨 유치원 동요도 아니고. 아무래도 평소에 쓰던 음악이 제대로 나오지를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기분이라면 차라리 쉬고서라도 다시 쓰는 게 났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슬럼프가 또 온 것일까. 전에도 이런 적이 몇 번 없지 않아 있었다. 곡을 살아가기 위해서 쓴다는 기분이 들 때의 그 처절한 패배감. 씁쓸함. 누군가가 내 노래를 들어줄까, 싶은 불안감이 자신을 덮칠 때면 누구보다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불규칙적으로 쿵쿵 뛰는 심장 소리. 머릿 속에서 얽혀버리는 여러가지 생각들. 보라색 편지, 팬들, 콘서트, 컴백, 음악, 박지민.


박지민.


그 이름 세 글자가 자꾸만 다른 단어를 떠올리려고 해도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이런 슬럼프가 올 때면 새로 도착한 보라색 편지 한 장을 손에 쥐고 있음 괜찮아지는 기분이 들었는데. 그 마저도 저지되는 중이고. 박지민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 감정은 뭘까.


미운 감정? 싫은 감정? 복잡미묘하게 이리 저리로 거미줄처럼 엮여있는 생각에 머리가 아팠다. 감정이 이런 식으로 어렵게 느껴진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애초부터 누군가와 깊게 관계를 맺는 타입도 아니고, 싫다면 싫다고 말하는 쪽이었기에. 다시 말해, 호불호가 강한 사람에 속했다.


거슬린다면 눈 앞에서 지워버리면 그만이었다. 생각 조차 하지 않으면 그만이었고. 지민에게도 똑같이 대하면 될 일인데 왜, 왜. 왜 자꾸만.


"...그 토끼같은 얼굴이 떠오르는건지."


연달아 마른 세수를 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이제 헷갈릴 법한 타이밍에.


뚜르르-.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아, 이런. 평소 작업을 하다보면 방해 받기 싫어 전원을 꺼두기 일수인데 어찌나 정신이 없었던지 그 마저도 까먹은 모양이었다. 입 모양으로 욕짓거리를 하고선 천천히 전화를 받아들자 귓가에 울리는 소리는 다름 아닌,


-형! 나 입국했어요.


남준이었다.


"...어, 그래?"

-뭐야, 반응이 왜 그래요? 나 기다린 거 아니었어요?

"누가 널 기다려. 안 기다렸어."

-목소리는 고민이 있다는 목소리인데. 아니에요?

"...눈치 빠른 새끼."


이런 쪽으로는 아주 도가 트였지, 도가 트여. 피식 웃으며 중얼거리자 그새 그걸 또 알아들었는지 수화기 너머로 남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술 사줄래요? 상담해줄테니까.

"그냥 술 마시고 싶은 게 아니고?"

-아무렴 어때요. 형이랑 안 본지도 오래 됐잖아요.

"......"


언더 시절부터 함께 해줬다는 부분이 커서인지 왠지 모르게 녀석에게는 모든 것을 털어놓게 만드는 신비한 힘이 있었다.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는 성격 탓에 막막한 감정을 어딘가에 풀지도 못할 때마다 자신을 도와주는 그에게 한 편으로 고마웠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민폐가 아닐까 싶은 생각에 잠시나마 망설였다.


그러나 뒤이어 이렇게까지 자기 감정을 숨기고 살다 보면 결국 곡 작업 하나 끝내지 못하고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지민에게 화풀이를 할 것만 같다는 생각에 잔뜩 구겨진 미간을 꾹 꾹 누르며 그에게 대답했다.


"...그럼 그렇게 하자. 평소에 자주 먹는 바에서 오늘 저녁 만나."



-



여전히 시끄러운 분위기였다. 재즈 풍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조금은 어두운 내부에 얄팍한 빛만 내보내는 주황색의 무드등. 여러 사람들에게 묻혀서 술을 마신다는 걸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남준은 유독 이런 분위기를 좋아했다.


누군가와 공존한다는 것, 녀석은 그 사실 한 가지를 참 좋아했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윤기와는 달리, 그는 어딘가 모르게 사람이 있어 자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만 같았다. 처음 이 곳에서 술을 마셨을 때도 달려있었던 네온 사인은 이제 제법 낡아서인지 몇 분에 한 번씩 번쩍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원초 사람을 잘 기다리게 하지 않는 녀석임에도 불구하고 약속 시간인 8시를 훨씬 넘긴 것을 알아채고 그는 한숨을 깊게 내쉬며 손목시계를 바라봤다. 술 사달라고 한 게 누군데 늦어.


"아, 형 미안해요. 차가 밀려서."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손에 한가득 기념품이라고 칭할만한 것을 잔뜩 들고 제 자리로 오는 남준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다 뭐야, 추궁하듯 물어보자 이번 해외에 나간 기념으로 사왔던 물건이란다. 빈 손으로 오기는 좀 그래서 들고 왔다나, 뭐라나.


피규어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예나 지금이나 어딜 가기만 하면 기념품으로 곧잘 '피규어'를 사오는 그의 버릇은 하나도 고쳐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것도 죄다 윤기의 취향이 아닌 것들만 사와서는. 턱을 괸 채로 피식 웃자 그의 마음도 조금은 누그러졌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무슨 고민인데요?"


아까와는 달리 조금은 가라앉은 목소리. 아무래도, 고민을 들어주고 상담 해주겠다는 말은 진담인듯 싶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메뉴판을 보면서 일부러 더 쓴 술을 골랐다. 단 게 입에 들어가면 거짓말을 해버릴 것 같아서. 남준은 맥주, 저는 쓴 술.


술이 나오고 나서도 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한참 하고 있다가 손에 쥐었던 잔을 한 번 홀짝 마시고서 그는 입을 열었다.


"내 결혼 전부 거짓말이야."

"...네?"


이럴 줄 알았다. 예상을 전혀 못했던 것인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안주로 나온 과일을 입에 넣으려던 남준은 갑작스런 그의 고백에 그대로 눈을 크게 뜨고서는 손을 바닥으로 내렸다. 정작 그 중요한 비밀을 털어놓은 쪽은 오징어 다리까지 질겅질겅 씹으면서 피실 웃고 있었지만.


"거짓말이라고요?"

"어."

"무슨...형 결혼식도 올렸잖아요."


하긴. 기사에는 누구보다 행복한 두 사람으로 날조까지 되어 실려 있었으니. 이렇게 좋은 연기력을 키우려고 연예인이 됐던 것이 아닌데. 의도치 않게 자신의 친한 사람에게 조차 들키지 않을 만큼 행복한 '척'을 한 모양이었다. 본격적인 고민을 털어 놓으려면 전부 이야기 해야겠지 싶어 입을 달싹이던 윤기는 몇 분 동안이나 길었던 이야기를 줄이고, 줄여서 얘기를 꺼냈다.


소속사에서 결혼 압박이 들어왔다는 것과, 자신과 결혼한 사람은 평범한 일반인이 아닌 대기업의 숨겨진 둘째 아들이라는 것. 자신의 인생을 쫑냈다는 사실과 보라색 편지가 끊겨 마음이 복잡하다는 것과 어떻게 그 사람을 대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솔직한 심정.


털어 놓다 보니 이상하게, 이야기의 흐름은 지민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일부러 차갑게 대하게 된다던지, 그렇다고 기자들 눈 때문에 따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것과 곡이 제대로 써지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 그 이야기를 하는 내내 남준은 얌전히 무표정으로 들으며 고개를 가끔가다 끄덕일 뿐이었다.


애써 비싼 맥주를 시켜놓고서는 이야기를 듣는 내내 한 모금도 마시지 않는 모습이 의아하긴 했지만.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남준은 어느 정도 이해를 했는지 한숨을 깊게 푹 내쉬었다.


"요는, 형이 그 박지민이라는 아내 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말이네요."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런데요, 형."

"...응."


잠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싶던 남준은 다시 손을 뻗어 제 앞에 있는 체리를 입안에 쏙 넣었다. 달고 시큼하게 터지는 과즙이 이상하게 두 사람을 생각나게 만드는 윤활제 역할을 하는 것만 같았다.


"박지민이라는 사람 입장도 생각해 봤어요?"

"...어?"


남준의 입에서는 예상 외의 말이 터져나왔다.


"형이 무슨 말을 바라서 나한테 이 이야기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제 3자의 입장으로 말할게요."

"......"

"둘 나이 차가 4살이라고 했나?"

"......"

"아직 형보다 4살이나 어려요, 4살이나."

"......"

"대학생이라고도 했죠? 그래도 형은,"


다 해봤잖아요. 남준의 그 말 한마디가 품으로 깊게 와서 박히는 것만 같았다. 똑바로 매섭게 뜬 눈. 남준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 정직하게 제 3자의 입장으로. 그가 무슨 말을 할 때 예리하고 정확하게 지적을 해준다는 사실 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 심장이 아픈 건가. 예상치도 못한 부분을 찔러넣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음악. 지금까지 실컷 했잖아요. 커다란 경기장에서 공연 해보고 싶다는 꿈도 이뤘고, 형의 꿈을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팬들이 아직도 그렇게나 많고."

"......"

"근데 박지민이라는 그 아이는 어때요? 아직 대학생인데 인생이 쫑났다는 건 그 아이도 똑같잖아요. 더군다나 대기업의 자제라면서. 그런 압박 더 심할 거 아니에요."

"......"

"힘든 거 알겠는데. 형 혼자만 상처 받았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그 아이는 아직 형보다 훨씬 작고, 훨씬 어린 아이니까.


남준의 한 마디는, 시켜놓은 술보다 더 쓰디 썼다. 새삼스레 머릿 속에서 말을 제대로 꺼내지 못해 우물쭈물 망설이는 지민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직 젖살이 제대로 빠지지도 않았으면서 끼니를 챙기지 않았는지 어쩐 것인지 마른 몸과 얇은 손목. 무언가에 자꾸만 얽매이듯 눈치를 보는 표정과 제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장면들.


아.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아무것도 모르게 되어버렸다.

JM BOTTOM/ONLY SUJ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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