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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소 07

아. 내가 언제부터 잠들었던거지? 밤은 고요를 가져다 준다고 했던가. 풀을 발라놓은 것 마냥 무거운 눈꺼풀을 한참동안이나 뜨려고 애쓰던 찰나에, 겨우 겨우 확인한 첫번째 것은 창문으로 조금씩 들어오는 달빛이었다. 여름이 다 가고, 가을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창 밖 너머로 잔잔한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분명히 그와 얘기하고 있었던 기억이 나는데. 아, 그러고 보니 꽤 낯부끄러운 소리를 해댔던 것 같다는 자각이 들었다. 목이 너무나도 따가워 목소리를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지만 아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몸이 조금은 편해졌다는 것. 아마도 열이 내린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몸은 바스라질듯 아파서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예상치도 못한 것이 이마 위에서 툭하고 떨어졌다. 축축하고, 열이 옮겨붙어 그런지 조금은 미지근한. 잠시동안 이게 뭘까 고민하며 잔기침과 동시에 손으로 천천히 집어들자마자 그것이 물수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게 왜 여기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다시 떠봐도 물수건이었다. 그것도 누군가에게는 한번도 해준 적이 없는 것인지, 익숙하지 않은 것인지 누가 봐도 엉성한 그런 물수건. 이런 일을 해줄 사람은 단 한 사람 밖에 없다는 사실을 지민은 잘 알고있었다.


그래봤자 집 안은 저를 포함해 딱 두 명 뿐이니, 추측을 하지 않아도 답은 나와있는 것이었지만. 한참 동안이나 물수건을 바라보며 입을 달싹였다. 그러고보니 아주 조금씩 단편적인 기억이 머릿속에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한 기분이 들었다. 울며 불며, 알지도 못할 소리들을 지껄이다가 그대로 정신이 혼미해져 열기운에 눈을 감아버렸던 것.


그 후로도 자신의 이름을 수없이 부르며 흔들어댔던 그의 목소리가 아직까지도 귀에 남아있는 것 같아 입술을 앙 다물었다. 괜히 신경 쓰이게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 뿐이었다. 안 그래도 요새 작업 한다고 힘들었을텐데. 꿈결인지 아니면 실제로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인지는 아직까지도 알 턱이 없었으나. 가까이 온 그에게서는 달달한 사탕 냄새가 감돌았다.


달달하게 코 끝을 스치다가도 이내 멍하니 사라져 버리는 그런 사탕 냄새. 착각일까? 싶으면서도 잊혀지지 않는 그 냄새에 지민은 잠시나마 눈을 감으며 그 장면을 회상했다. 알지도 못할 소리를 자꾸만 내뱉었으니 그의 머릿속에서 자신이 이상하게 각인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결혼 후에도 계속 품에 품고 살았던 말들을 한꺼번에 내뱉은 탓일까. 속은 한결 편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의 마음도 똑같이 편해졌으면, 하고 약하게 바라보지만. 이 상황에서 또 너무 많은 것을 바라면 그것이 혹여 그에게 안 좋은 일로 다가올 것만 같아 한 편으로는 조금 두려웠다.


시간이 아주 약간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까 새어 들어왔던 달빛보다 훨씬 많은 달빛이 휘영청 지민의 방 안으로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혹여라도 그 달빛에 자신의 손이 닿을까 미미하게 뻗었던 손이 무색할 만큼, 그의 침대에서 달빛까지의 거리는 제법 되는 모양이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데 닿지 못하는.


어쩌면 달같은 그 사람을 꼭 닮았다.



-



"...병원도 안 가고."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의 밤은 고요했다. 이따금씩 들리는 풀벌레 소리와 이따금씩 색색거리는 침대 주인의 목소리만 방 안에 울리는데. 이상하게 발걸음은 떨어지지를 않았다. 미안하다고 연신 사과를 하며 펑펑 울다가 갑작스레 제 품 안에서 정신을 잃은 지민은 한 편으로는 꽤나 당혹스러운 존재였다.


성격이 소심하다, 라고까지는 생각해 봤는데 막상 자신이 아픈 것까지 참아내는 모습을 보아하니 헛웃음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열이 저렇게 펄펄 끓면서. 살면서 누군가에게 물수건을 얹어주는 일은 처음이었는데 막상 아픈 사람이 눈 앞에 닥치고 보니 머릿속이 온통 적색 등으로 붉게 타올랐다.


덕분에 제대로된 처치 하나 못해주고 이마에 얹어둔 엉망진창인 물수건 밖에 해줄 것이 없었지만. 아까보다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침대에 누워있는 지민의 얼굴을 보자니 절로 한숨이 나오는 기분이었다. 하다못해, 걱정이라도 끼치지 말 것이지.


"...걱정?"


내가 지금 걱정한다고 생각했었나? 순간 든 생각에 미간을 찌푸리다가도 고개를 절레 절레 저었다. 감정적으로 나설 부분이 아닌데도 이상하게 박지민이라는 녀석이 연관되기만 하면 꼭 무엇이라도 되는듯이 격정적으로 나아가고 있는 자신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필코 이번에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아까만 해도 그랬다. 여전히 볼이 부어있는 녀석을 보아하니 핀트가 나가버려서 정작 해야 할, 못 할 말은 구분도 못하고 마구잡이로 내뱉어 버렸다. 혹여 상처를 준 것은 아닐까 고민을 하면서도 지금껏 그 아이에게 상처를 준 것이 얼마인데 이제 와서 걱정을 하냐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 나는 나쁜 놈이었다. 행복을 앗아간 걸로도 모자라 수없이 상처를 입히고 남준의 말처럼 제 입장만 생각하는 그런 이기적인 나쁜 놈. 술에 취해 있을 때마저 객관적인 시선으로 제게 조언을 해주곤 했던 몇 년 전의 남준이 생각났다. 그 때도 슬럼프에 빠져 있었었지, 아마.


음악을 관두고 싶다는 말에 보라색 편지까지 손에 쥐어주며 이제 와서 약한 마음 먹지 말라 강하게 말하던 그의 모습이 생각나자 피실 웃음이 나왔다. 그 덕에 이 자리까지 올라오고, 이 상황까지 오게 됐지만. 뭐, 굳이 말하자면 제 선택이 후회가 되지는 않았다.


그저, 그 때처럼 제게 객관적인 말을 해주는 남준 덕에 지민과의 관계나 연관성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지 감이 안 잡히는 것 뿐이지. 내일부터 당장 작업실에 나가야 할텐데 몸 상태가 안 좋은 지민이 걱정이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몸이 안 좋으면 그 때라도 병원에 데려가야 할 것 같은데.


싫어하는 그의 몸을 들어올려서 억지로 차에 태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제의 그 태도를 보아하니 여러 모로 부담스러워 할 것 같아 골머리를 썩히는 중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협탁 위에 올려져있던 지민의 휴대폰 위로 문자 메세지 알람이 떠올랐다.


[김태형]

너 병원은 갔어? 오밤중까지 아픈 건 아니지? 필기 노트 정리해뒀으니까 내일 가져가.

[김태형]

돈 없다고 병원 안가지 말고. 이번 달 알바비 안 들어온 거 아니까 이 형님이 좀 빌려줄게. 그러니까 좀 그만 아파라.


훔쳐보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의도치 않게 그저 눈에 들어왔을 뿐이지. 한번에 두 개씩 오는 문자를 액정 화면으로 보자마자 그의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 움직였다. 전혀 듣도 보지도 못한 내용의 말이었으니까. 알바비가 안 들어와? 돈이 없어?


그래서 병원을 안 간거, 아니 못 간 건가?


그것보다도 더 원초적으로 떠오르는 질문이 있었다. S기업의 자제에게 돈이 부족할 상황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을텐데. 알바라는 것은 또 무슨 내용이며 돈이 없다는 것은 사실인지.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문자만 해도 그랬다. '김태형'이라는 사람이 문자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지민과 가까운 사람이라는 것은 아주 잘 알 수 있었으나 그럼에도 초조해지는 마음.


나는 왜 그런 것 하나도 모르는거지? 이상하게 그 질문 하나만으로도 어두운 저 마음 밑구석까지 잠식되는 듯한 기분이 들다가 다시금 지민에 대해 알아보려 하지 않은 것은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어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운명의 장난인 건지 무엇인지. 휴대폰 옆에는 지민의 지갑이 얌전히도 올려져 있었다. 제법 낡은 디자인의 가죽 지갑. 처음 레스토랑에서 만났을 때 그가 한가득 입고 있었던 명품 옷들과는 달리 지갑은 이니셜이나 브랜드 네이밍도 하나 없이 평범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여러 군데 가죽이 갈라져 있었고, 손 때가 타서 어느 부분은 거뭇해진 곳도 있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연신 마른 세수를 하다가 조심스레 지갑을 올려 들었다. 두께감이 없다는 것에서부터 돈이 안 들어있다는 것은 직감할 수 있었으나 조심스레 지갑을 펼치자 마자 드러나는 공허함에 실로 허무할 뿐이었다.


들어있는 것이라고는 대학교 학생증과 교통카드, 그리고 텅 텅 비어있는 지폐 칸. 어찌 성인이라는 작자가 카드 하나 없이 다니고 있는 것인지 알 턱이 없었다. 혹시 영수증 칸에 숨어있기라도 한 것인가 싶어 거꾸로 뒤집어 흔들자 나는 짤랑짤랑한 동전 소리에 무언가 모를 기대심에 가득차 동전 칸도 열어보았지만.


"...돌겠네, 진짜."


자리한 것은 10원짜리 두 어개와, 100원짜리 3개. 도저히 26살의 대학생의 지갑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아니, S기업의 둘째 아들의 지갑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겠지. 이번 달 알바비가 들어오지 않았다는 말은 지난 달 알바비는 들어왔다는 소리인데 대체 그 돈을 어디에...


"아."


불현듯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저를 위해 차려주던 밥상. 그런 쌀들과 반찬들이 땅이나 하늘에서 솟아날 리도 없고, 결혼한 후에 서로의 계좌를 합치거나 돈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으니 당연스레 제 돈이 지민에게 갈 리는 없는 터였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밥을 차려주던 그 모든 비용은 지민이 부담했다는 소리가 되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마자 순간 앞이 깜깜해 잘못하면 그가 깰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 멀리 떨어진 침대 맡에 털썩 걸터 앉았다.


참 미련한 사람이었다. 돈에 대한 것을 입 꾹 다물고 한 달 동안 제 몸도 챙기지 않은 채 상대의 밥을 챙겼던 사람과 그런 사람의 속을 눈치 채지도 못한 사람 둘 다. 아직 자세한 사항들은 알 턱이 없었다. 대기업의 자제인 주제에 왜 그렇게 용돈 하나도 못 타서 쓰냐는 말도 할 수가 없었고, 그런 걸 물었다가는 곤란해 할 모습이 뻔히 보였으니까.


아무리 서로에 대한 인식이 앙숙 같다고 해도, 기본적인 예의는 지키자는 것이 그의 신조였다. 그럼에도 병원은 데려가야 하는 꼴이었고 대학생에게도 돈이 많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 윤기가 더 잘 알고있는 사실이었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 해야 할지, 어떻게 티 안내고 도와줄 수 있을지. 그렇게 한참을 생각하며 발에 달빛이 드리울 때까지 그는 지민의 곁을 지켰다.



-



"...이게 뭐야?"


다음날 아침. 일어나보니 현관 속 구두가 없어진 걸로 보아, 그는 이미 출근을 나선 것 같았고. 느지막하게 학교를 가기 위해 일어난 지민은 제 협탁 위에 놓여있는 물건을 보고서 한참이나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퉁퉁 부은 얼굴에 아직도 온 뼈마디가 아팠지만, 제일 당혹스러운 것은 협탁 위 '그 물건'이었다.


손바닥보다 작고 직사각형 모양의 얇은 판.


카드였다.


"이게...왜...여기에...?"


게다가 카드 번호 밑을 보니 당연하다는듯이 영문으로 '민윤기'라는 글자가 세겨져 있었다. 그 글자 때문인지 더 한참 동안이나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일어날 수 있었던 모든 경우의 숫자를 생각해 보았으나 답이 나올 리는 없는 노릇이었다.


잠결에 그가 실수로 떨어뜨리고 갔다기에는 휴대폰 밑에 너무나도 얌전히 놓여져있기에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고, 어제 새벽 잠깐 깨어났을 때는 어지러운 머리에 정신 겨를이 없어 협탁 위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카드를 대체 어떻게 처분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찰나에 띠링, 하고 휴대폰 알람이 울렸다.


'오늘 병원 가.'

'카드 내역 확인할 거니까 잔말 말고.'


저장되어 있지도 않은 번호. 그러나 지민은 이 익훅하고도 낯선 11자리를 알고 있었다. 문자를 보자마자 얼굴에 열이 다시 오르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심장 박동수도 기하학적으로 증가해 쿵 쿵, 제자리를 지키는 꼴이라니. 레스토랑에서 처음 만난 날, 성의 없이 휘갈겨 적어준 번호를 아직까지도 저장 못하고 그저 몇 번이나 꺼내서 바라봤던 지민이었다.


외울만큼 봐서 이제 종이가 너덜너덜해질 법도 한데. 이 문자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카드의 주인, 민윤기였다. 모든 수수께끼자 풀릴만큼 간단 명료한 답이었는데도 지민은 카드를 한 손에 쥔 채 쉽사리 답을 내지 못했다. 실수로 떨어뜨리고 간 것은 다행히 아니란 소리인데. 대체 그 사람이 나한테 카드를? 왜?


무엇이던지 간에 답장은 해야할 것 같아서 한참을 휴대폰을 들고서 망설이던 지민은 몇 번이고 문자를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가 겨우 전송 버튼을 눌렀다.


'이 카드 제 거 아닌데요...'


문자의 답을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인지, 아니면 우연찮게 핸드폰을 들고 있었던 것인지. 그에게서는 금세 답장 한마디가 틱 날아왔다.


'알아.'


단 두 글자의 문자. 너무나도 간단한 답에 고개를 갸웃한 지민은 무슨 의미인가 싶어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댔다. 알아, 뭘 안다는 거지? 이 카드가 자기 것이라는 걸 안다는 걸까? 그렇다면 왜? 왜 나한테 준 건데? 혹시나 어제 정신이 없이 돈에 관련된 무슨 말이라도 그에게 무심결에 지껄였나 싶어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암만 생각해도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결론에 끙끙 앓는 지민이었다.


누군가에게 이런 식으로 돈에 대해 지원을 받는 것도 처음이었거니와, 자신이 돈을 빌려줄테니 병원에 가라던 태형의 문자를 오늘 아침에서야 발견해서 괜찮다고 답장을 보낸 마당에 기어코 녀석은 자신을 병원에 보내고 싶었던 것인지 약한 부분을 찔러왔다.


'그러다 민윤기한테 감기 옮으면 너 또 지랄할 거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가뜩이나 민폐 안 끼치려고 노력하는데. 혹시, 그도 같은 마음인 것일까? 태형의 말대로, 자신에게 감기가 옮는 것이 싫어 카드를 준 것일까? 제가 아는 그의 성격 상 그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지만, 요즘은 작업 시즌이었고 주위에 중요한 사람들도 작업에 참여하는지라 그 또한 다른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고 싶지 않은 심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대로 계속 아팠다가는 알바는 커녕, 그의 끼니를 챙겨주거나 다른 기타적인 보조를 하는 것도 불가능했고. 그런 저런 고민을 하면서 문자에 답장을 할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뚫어져라 액정만 쳐다보고 있는데.


"엄마야!!!"


순간 지이잉, 하고 진동이 울리더니 그에게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무심하게 저장이 안 된 번호를 보면 그가 무슨 생각을 할까 싶으면서도 어느 틈에 자신의 번호를 저장해 둔 것인지 알지 못할 다정함이 괜히 속에서 녹아버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직접 물어보는 편이 그에게도, 자신에게도 플러스적인 요소겠지만. 왠지 모르게 무서웠다. 그의 입에서 이 이상 민폐 끼치지 말라는 말이 튀어나올까봐. 물론 바라고 있는 바이긴 하였으나, 그래도 본인에게 들으면 확실히 사살 당하는 기분일테니.


그렇게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다, 전화가 끊기기 직전 겨우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귓가에 갖다댄 지민은 한참동안이나 나오지 않는 목소리에 혹시 이미 끊어진 건가 싶어 휴대폰을 잠시나마 귓가에서 멀리 떨어뜨렸다.


"아닌데...안 끊어졌는데..."


중얼중얼 거리며 이상하다,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찰나 수화기 너머로 제법 차갑고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이렇게 늦게 받아.

"네? 아 그게..."


갑작스레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휴대폰을 바닥으로 떨어뜨릴 뻔 한 것을 겨우 겨우 붙들며 귀에 갖다댔더니 그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이러쿵 저러쿵 무어라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너무나도 작아서 잘 들리지도 않았지만 와중에 그가 중얼거린 소리는 퍽 정성이 담긴 말이었다.


'아직까지도 아파서 누워있는 줄 알았네...'


오직 윤기에게 전화가 걸려왔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기분이 들떠 그런 작은 소리까지 잡아낼 정신이 없었던 지민은 그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작업실에서 한참이나 앉아있었는데도 집에 놓고 온 열덩이 꼬마 녀석이 생각 나 곡은 커녕 비트 하나 못 치고 있던 그는 참다 참다 전화를 걸었다.


카드를 놓고 온 의미도 없던 것 같고. 무엇보다 문자를 보냈는데 뻔히 읽었으면서 답장을 안 하는 건 뭐람. 다행히 목소리를 들어보니 어제보다는 훨씬 나아진 것 같아 조금은 안심이었다. 딱히, 감정이 있어서 걱정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곁에 있는 사람이 아프니까 더 신경이 가는 것 뿐이지.


"카드 써서 병원 가고."

-아니 저 진짜 괜ㅊ...

"내가 안 괜찮아. 괜히 같은 집안에 있으면서 아프지 말고 그냥 가."

-...네에


아. 또 이렇다. 말이 곱게 안 나가는 건 버릇인가. 금세 시무룩해진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자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에 잔뜩 구겨진 미간을 꾹꾹 누르면서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옮기 싫다, 그런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알아요...윤기씨 다정한 사람인 거...


그 말에 그의 눈썹이 미묘하게 올라갔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녀석의 말에 장단을 맞춰줘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26년 살면서 저의 이름을 들어보긴 했을지 알지도 못할 지민의 입으로부터 그나마 '다정하다'라는 인식으로 남는 게 다행이라는 마음이 더 컸다.


차라리 애매하게 나쁜 놈일 것이라면, 거짓으로나마 다정한 사람으로 찍혀있는 편이 나았다. 작업실 의자에 몸을 기대 여러번 삐걱 거리는 소리를 내며 앞뒤로 천천히 왔다갔다 하다가 그는 입을 열었다.


"카드 한도 안 정해놨으니까. 그냥 써, 그거. 앞으로도."

-네?

"준다고. 그 카드."

-...누구한테요?

"...너."

-아니, 그...저...카드를요?

"어."


뭐야, 반응이 왜 이래. 카드를 줬다고 해서 좋아할 것이라는 인상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안심은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대기업 자제에게 카드를 준다는 건 어찌보면 소심하고도 작은 일일까? 자신이 지금 입술을 잘근 잘근 깨물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는 건너편에서 으음, 하고 고민하는 듯한 비음을 들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돌려준다고 해서 나 안 받을거니까. 곱게 말할 때 써라."


또, 또.


생각지도 못한 거친 말들이 입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괜히 말한 후에야 주책이라며 손으로 입술을 때려도 내뱉은 말은 소용 없다는 걸 잘 알면서.


왜 자꾸 곱지 않은 말이 나가는 것일까.

JM BOTTOM/ONLY SUJ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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