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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소 08

"약 3일치 처방해 뒀으니, 열이 오르면 그 때 다시 찾아오시고. 오늘은 그만 가보셔도 좋습니다."


제법 멍한 기분이었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걸까, 싶은 바보같은 생각도 들고. 새하얀 벽지로 가득 도배되어있는 방. 그 한가운데에 앉아있는 의사 선생님. 여기가 병원이라는 것을 자각이라도 시켜주듯 지독한 약품 냄새가 코 끝을 찔렀다.


고집을 이기는 사람은 없다고 했던가. 괜찮다고, 이 정도는 알아서 하겠다고 몇 번을 말해도 그의 단호한 말투는 수그러들 틈이 없는 것만 같아 보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0분간의 통화 동안 수화기에서 들려온 말들을 요약하자면 카드로 병원을 갔다와라, 라는 말이었다.


그게 그렇게 길게 말해야 하나 싶은 생각과 동시에 괜히 그에게 신경 쓰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속을 거북하게 만들었다. 결혼 후에도 그에게는 아무런 영향 하나 끼치고 싶지 않았는데. 같은 사람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그가 타인에게 지나치게 다정한 탓일까.


결제를 하면서도 이걸 과연 그의 카드로 결제해도 되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생각이 온 머리를 가득 채웠다. 그렇게 큰 돈은 아니었지만, 이로써 온전히 그에게 의지했다는 증거를 만들고 있는 셈이니까. 애초에 사랑도 없는 결혼에서 싹 트는 관계성이 유효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분명 지민은 그를 곧이 곧대로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그의 노래를 듣고 잔뜩 설레서 몇 날을 그의 앨범을 사는 것으로 일과를 마무리했던 몇 년 전의 그 시절과, 감정 하나 없이 결혼 해 그의 아내가 된 지금까지도 여전히. 결국 결제 내역을 확인 하겠다는 협박 반에 떠밀려서 얼떨결에 계산 창구로 그의 카드를 들이밀긴 했지만.


어떻게 보면 필연적인 이끌림 아니었을까?


결제가 완료되고 처방전과 함께 카드를 돌려받을 때까지도 머릿 속은 복잡했다. 이것이 그저 사람의 호의를 받아들여 이루게 된 일인지, 아니면 아직도 팬의 마음을 못 버리고 우상인 그와 조금이라도 접점을 만들고 싶다는 심산인지.


누구든지 잘 알고있는 사실이었다. 좋아한다면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고, 좋아한다면 그 사람이 웃었으면 좋겠고, 좋아한다면 그 사람이 상처 하나 없는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는 것 쯤은.


더 나아가서는,


좋아하는 그 사람과 한 순간이라도 좋으니 함께 있고 싶다는 그런 생각.


가지면 안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의 인생에 그 어떠한 오점도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의 다정한 성격과는 정반대로 모가 나있는 카드를 어느새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민윤기'라고 새겨진 영문이 그의 카드라고, 나는 지금 좋아하던 가수의 카드를 만지고 있다고, 증명해주는 것만 같아서.


기분을 가라앉히려고 해도 자꾸만 깊은 곳의 심장이 뛰었다. '사랑', 이라는 복잡한 감정과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의 설렘이었다. 그저 순수한 우상에게로의 동경, 행복을 바라는 마음. 그런 마음들이 온갖 곳으로 다 섞여 엉망인데도 그랬다.


행복하다는 마음을 가지면 안되는 건데. 나라는 사람이 행복이라는 감정을 가지면 안되는 건데.


"...이러면 안되는데."


중얼거리면서 약국에 가 처방전을 내밀 때까지 조그마한 머리를 굴려 봤으나, 나오는 정답은 마땅히 없었다. 어렸을 때 고모님에게 들은 말들은 죄다 상처가 되는 말들 뿐이었지만. 상처는 흉터를 남긴다고, 그런 모든 말들은 잊으려고 노력해도 도저히 머릿속에서 떠나가지를 않았다.


그 중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한 마디. 집에 오고서도 약 1년이 지났을 때였나. 나름의 배려였던 것인지, 아니면 죽은 자신의 오빠 얼굴이 생각나서인지. 평소 걷어차던 복부를 대신해 그녀는 어린 지민의 뺨을 때렸다. 알싸하게 감도는 통증과 터져나오는 눈물. 어린 살 탓에 입술도 터졌었던가.


피비린내가 감도는 입 안이 죽도록 싫다는 느낌은 그 곳에서 출발한 기억이었다. 달달 떨며 고모님에게로부터 벗어나려 몸을 일으켰다가 그대로 잡혀서는 귀에 박히도록 들은 그 한마디는 퍽 잔인했다. 누군가가 행복하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행복을 앗아갔다는 것.


나에게 행운이 찾아온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에게 불행이 찾아왔다는 것. 내가 태어나서, 내가 잠시동안 행복했기 때문에 자신의 오빠는 죽었다고, 죽음이라는 불행을 맞이한 것이라며 그 후에도 수차례 뺨을 때렸다. 퉁 퉁 부어 잘 벌리지도 못하는 양 볼보다 더 서러웠던 것은 그토록 사랑했던 자신의 부모의 죽음이 어쩌면 나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자책과 그로부터 비롯된 죄책감.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부정을 하려고 해도 어느 틈에 그런 부정적인 말에 잠식되어 버린 것인지 지금까지도 부모님의 얼굴을 생각하면 가슴 속이 아릿했다. 어쩌면 나는 정말, 행복한 감정을 느끼면 안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태어나면 안 될 존재였다고 생각하면서.


한껏 불행한데도, 한껏 속이 문드러지는데도 행복한 척을 해야만 제 소중한 사람이 진실된 행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눈물이 흐르는데도 함박 웃음을 보여준 적이 여러번. 조금은 자신의 이런 처지에 서러울 법도 하면서 괜스레 그걸 입 밖으로 낸 적은 없었다.


충분히 힘이 강해지고, 이제는 자취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도 지민은 고모님에게 반항 한 번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녀가 때리는 손길을 잡아챈 적이 없었다. 맞고, 또 맞고. 어쩌면 나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이유가 없어지지 않을까?


싶은 회의감에. 울컥 눈물이 나와도, 입 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감돌아도 참고 넘어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제게, 이런 소심한 행복을 느껴도 된다고 말해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힘든 걸 티내는 쪽도 아니었고. 집안 사정을 알고있는 태형만 해도 알고 지낸지가 오래였으나 아무런 위로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민윤기'라는 사람의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 상황에서 더 큰 행복을 바란다니. 더 큰 행복을 느낀다니.


"...너무 오만하잖아."


어쩌면 그에게 더 큰 불행을 가져다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손에 쥔 카드가 차마 놓을 수 없을만큼 눈부셔서. 이대로 놓아버리면 영영 놓쳐버릴 것만 같아서.


계속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또 샀어?"


평소라면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는 바보같은 태형은 꼭 이럴 때만 눈치가 빨랐다. 가을의 쌀쌀한 기운이 온 몸을 덮쳐오고 있는데도, 전혀 춥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 것인지 감기에 걸려 고생하고 있는 지민의 앞에서 아이스크림까지 쪽쪽 빨며 미간을 살짝 구긴 태형은 어깨 너머로 흘긋 가방 안을 바라봤다.


"아니...그게..."

"어차피 보내지도 않을 거면서, 뭘 그렇게 또 사."


버릇이라서, 라고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혹여 누군가가 볼까봐 두려워 급하게 손으로 밀어넣은 탓에, 가방 안에 처박혀버린 제 소중한 물건에 자꾸만 눈이 갔다. 영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뒷머리를 긁적거리던 태형은 이내 깊게 내쉰 한숨과 함께 밥이나 먹으러 가자는 말을 내뱉었다.


"그 돈으로 병원을 한 번 더 가겠다. 아니면 너 좋아하는 디저트라도 사 먹던가."

"그래도..."

"그래도는 뭔 그래도야. 어서 가방이나 챙겨. 또 순서 밀려서 기다리기는 싫으니까."


손에 들려있던 아이스크림의 마지막 한 부분을 와그작, 하는 소리와 함께 세게 깨물어 단숨에 삼킨 태형은 막대기를 쓰레기통 쪽으로 던져 넣더니 먼저 나가서 기다리겠다는 말과 함께 문 너머로 사라졌다. 그의 발자국 소리가 점차 멀어져 강의실에서조차 들리지도 않을 정도가 되었을 때 쯤, 지민은 왠지 모를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며 눈을 꾹 감았다.


꼭 들켜서는 안 될 것을 들킨 기분이었다. 수없이 태형에게 들키면서도, 핀잔을 들으면서도. 돈이 없어서 병원 하나 가지 못하면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지민에게는 딱 한 가지 있었다.


"...다 구겨졌네."


'보내지도 않을거면서.'


자꾸만 태형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더 구겨지지 말라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가방 안에서 꺼내든 것은 다름 아닌 보라색 편지지였다. 한 달에 두 어 번은 꼭 팬레터를 보내곤 했던 옛 버릇이 남아버린 것이라고는 하나. 사실, 결혼 전까지만 해도 꼬박 꼬박 실행해오던 몇 년간의 버릇을 고치기란 쉽지 않았다.


일상을 다 적기에는 너무 많은 부담감을 안겨주는 것만 같아 언제나 그에 대해 느끼는 감정들, 노래를 들으면서 위로 받았다는 말같이 시답잖은 내용 뿐이었지만. 자신의 손길이 닿은 편지가 어찌 보면 그의 손에도 닿을지도 모른다는 그 생각 하나만으로 우체국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즐거웠던 시절이,


'있었다.'


입술을 삐죽 내밀며 편지지를 여러번 쓸어내렸지만, 답이 나올리가 없었다. 저번부터 여러 장의 편지지에 수없이 같은 내용을 적다 지우고를 반복하고서는 끝내 보내지 못하고 버려버린 장 수만 해도 여러 장이었다. 똑같은 글씨체에, 똑같은 내용 뿐인데. 이상하게 자꾸만 그에게 거짓말을 말하는 것만 같아서.


내가 과연 그의 팬으로 남아도 되는걸까? 같은 그런 질문들이 머릿 속에 맴돌게 되고서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미 편지는 쓰레기통으로 직행하기 일수였다. 혹여 그가 볼까봐, 일부러 집에서 나와 멀리 빙빙 돌아버렸지만. 편지 한 장을 버릴 때마다 마음 한 켠이 찢겨져 나가는 기분이라는 것을, 과연 그는 알고 있을까.


보라색 편지의 존재를 아는지도, 나의 편지를 읽어주었는지도 알 도리가 없었다. 그에게는 그저 한낱 팬레터 한 장일 뿐일 것이라는 생각에 잠시나마 속이 착찹해지다가도, 지금 이 상황을 무마할 수 있는 어떠한 것도 없다는 생각에 속이 더부룩해졌다.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였다.


'밥은 잘 먹고 지내요?'


'곡 작업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요?'


하루에도 몇 번 씩, 얼굴을 바라보면서.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여러가지의 따뜻한 질문들. 그렇게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면, 도착하는 종결지는 딱 하나였다.


'지금 행복한가요?'


참 잔인한 질문. 여러가지 생각들을 하며 보라색 편지지를 다시 가방 안에 넣고 정리하던 중 그 질문에까지 마음이 닿자 그대로 손길이 우뚝 멈춰섰다. 저번 날의 일이 생각났다. 행복하냐는 질문에 씁쓸하게 웃던 그의 얼굴.


"어..."


분명 열은 내렸는데. 자꾸만 앞이 핑핑 도는 기분이었다. 두 눈가에 열이 푹삭 올라서, 꾹 감지 않으면 이 세상을 바라볼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그의 행복을 앗아갔으면서 팬레터까지 보내고 싶어하는 데다가, 그걸로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길 바란다는 것이 굉장히 이기적이라는 것을 알면서.


알면서도. 지민은 손에 쥔 편지지가 꾸깃꾸깃해질 때까지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



"편지는."

"...어?"

"버렸냐고."


시간이라는 것은 참으로 이기적인 것이었다. 때로는 누군가에게 추억이라는 무언가를 만들어주기도 하는 고마운 존재였으나, 누군가에게 시간이라는 것은 속박하는 족쇄가 되곤 했으니까. 몇 년 간을 오랫동안 지내온 태형을 족쇄라고 표현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지금만큼은 지민에게 그랬다.


아까부터 그토록 원하던 밥을 먹고 있음에도 깨작깨작 먹는 폼이 영 말이 아닌 터라 마주 앉아있던 태형은 참지 못한 채 지민의 식판 위에 남아있던 마지막 돈까스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우악스럽게도 물어왔다. 사실, 편지는? 이라고 물어봤을 때부터 그가 무슨 말을 의미하고 있는지는 알아듣고 있었다.


대답하기가 두려워졌을 뿐이지. 오랜 시간동안 함께해서였는지 그에게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서툴렀고, 거짓말을 하는 것도 썩 내키지가 않았다. 버렸냐는 말에 그저 묵묵한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편지지를 버릴 생각을 안 해본 것도 아니었다.


습관인 것을, 보라색 편지지만 보면 갖가지를 긁어모으는 게. 색깔이 조금씩 다른 편지지들을 보고 있자면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너의 기분과는 상관 없이 같은 집구석에 있는 윤기에게 그 편지지들을 들키면 어떻게 할 거냐는 말에도 지민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들키면? 그러고 보니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자신은 한낱 팬이 아닌 인생을 망친 어느 대기업의 자제로 밖에 보이지 않을 테니 함부로 팬레터라던지, 연예계 관련 일을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금이라도 그에 관한 논제를 꺼냈다가는 잔뜩 망가진 표정으로 네가 왜 그런 걸 궁금해 하냐는 말을 건네올 테니까.


상처를 받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몇 년 동안 쭉 보내오던 팬레터가 끊긴만큼, 그 팬레터를 못 보내는 자신만큼 어쩌면 윤기도 그리워하고, 괴로워하고 있지는 않을까 싶은 생각도 잠시나마 해봤으나. 보라색 편지라고 해봤자 지금은 하늘을 찌르는 유명세를 타는 그에게 있어 수백만개의 편지 중 하나일 뿐일테니 무언의 기대를 바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돈까스를 뺏기고도 아무말 없이 여전히 깨작깨작 밥알만 골라내는 모습을 보고있던 태형은 괜히 커다란 손으로 지민의 머리를 세게 헝클었다.


"아!"

"정신 차리고, 임마. 네가 사람 죽였냐?"

"...그런 거 아니야."

"풀 죽어있지 말라고. 잘못 없으니까."


그의 말에 입술만 삐죽 내밀었다. 잘못이 없는 게 문제인가.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는데. 괜한 걱정을 시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속으로만 궁시렁 궁시렁 거리고 있을 뿐이었지만, 역시 시간은 지민에게 있어 태형을 족쇄로 만드는 것인지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거 아니냐며 추궁해오는 그의 말에 괜히 시선을 피했다.


"카드는?"

"어?"

"아까 그 카드 뭐냐고."

"무슨..."

"다 봤어."


앞에 민윤기라고 적혀있는 거. 그 말에 지민은 입에 물었던 젓가락을 얌전히 식판 위로 내려 놓았다. 계산하는 짧은 찰나였는데도 그걸 보다니. 공부를 더럽게 안 해서 그런지 눈 하나 좋은 것 만큼은 녀석의 장점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태연하게 나머지 반찬들을 입 안에 욱여 넣으며 우물우물 씹던 태형은 마치 지민의 대답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눈을 연신 깜빡였다.


"네가 달라고 했냐?"

"무슨!!! 아니야!!!"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이러나 소리를 지른 지민 덕에 귀를 틀어막은 태형은 미간을 잔뜩 구기며 중얼거렸다. 민윤기와 관련된 일이면 감정 통제가 안된다는 사실을 예전부터 조금이나마 눈치를 채고 있었으나. 제 오랜 친구는 그런 소중한 민윤기와 결혼한 이후부터 그 증상이 더 심해진듯 했다.


"그럼 그 카드는 어디서 났는데. 설마 훔친 건 아닐테고."

"사람을 뭘로 보고..."

"그래서 아닐 것 같다는 말 덧붙였잖아. 그래서 결국 카드는 어떻게 된 건데."

"...윤기씨가 줬어."

"줬다고? 카드를?"

"...응."


무슨 심보로? 드디어 국물까지 한 방울도 남김없이 입 안에 털어넣은 태형은 만족한다는듯이 두어번 배를 통통 두드렸다. 이래 저래 고민을 한다고 결국 시켜놓은 돈까스 정식의 반은 태형의 입으로 들어갔지만 그에 대한 불만은 딱히 지민에게 있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카드를 훔쳐온 것은 절대 아닐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가 직접 줬다는 지민의 말은 태형에게 있어 예상 밖의 일이었다. 여전히 태형에게 있어 민윤기라는 존재는 친구를 상처 입힌 존재였고, 그닥 마음에 드는 존재가 아니었으니.


대체 왜?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병원 가고, 밥도 사먹으라고...아까 문자 왔어."

"...그 인간이?"

"카드 내역 확인할 거니까...밥 먹으라고..."


어쩐지 요새 돈 없다고 학식을 야금야금 뺏어먹던 녀석이 웬일로 정식을 다 시키나 싶더니. 이런 이유였나. 허탈한 웃음을 내비추는 태형을 지민은 안절부절 못한 태도로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태형의 얼굴은 이러 저러한 근거로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 애초부터 누군가의 감정을 읽는 것이 지민에게 있어 쉬운 일만은 아니었으나.


"그럼 너랑 그 사람,"

"어?"

"대체 무슨 관계인거야?"



-



"대체 무슨 관계인거야?"

"뭐가."

"보라색 편지의 주인 말이야."


그 말에 악보지를 사물함에서 꺼내던 그의 손이 우뚝 멈췄다. 그러다가도 이내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인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작업실 의자에 털썩 앉았지만.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한 번 으쓱한 보조 PD는 얼마 전 그에게로 옮겨와서 그런지 편지의 경위를 잘 모르는듯 싶었다.


아니, 알면서도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인가. 연예계에 발을 들이기 전부터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며, 불길한 아이라는 말은 잘 들어왔으나. 지금까지도 그 버릇은 뿌리깊고 관념있게 몸 안에 박혀있는 터라 털어내기 힘든 것이었다. 그게 좋지 않은 버릇인 걸 알면서도 그랬다.


손에 쥔 악보지를 구길 뻔 하던 것을 애써 참고 합리화를 하기 시작했다. 진정으로 궁금해서, 순수한 마음으로 물어보는 것일수도 있다, 라고. 윤기가 대답이 없자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PD는 비트를 다시 한 번 점검하며 고개를 두어번 흔들며 리듬을 타고선 다시금 말을 이었다.


"팬싸같은 곳에 자주오는 팬이었어?"

"...아니."

"그럼 콘서트? 그런 곳에서 보라색 후드티를 입었다던가, 뭐 그런..."

"그런 거 아니야."

"그러면 대체 왜."


그 팬레터만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거야? 이상하게 그 질문에 잘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속이 답답해 자꾸만 목 안으로 들이키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아들이던 빨대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러고 보니, 새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던 것만 같았다.


"단순히 팬?"


그 말에 다시금 망설였다. 팬? 단순히 이러한 감정을 팬에게서 느끼는 고마운 감정이라고 치부해도 되는 것일까. 혀로 볼 안 쪽을 한 번 쓸어올리고서는 그는 미간을 구겼다. 박지민과 보라색 펜레터. 그 두가지는 그에게 있어 무언가의 생각의 전환점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보라색 펜레터가 소중한 이유는 단순히 처음에 온 편지라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처음에 도착했기 때문에, 처음으로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이 생겼기 때문에. 단지 그 이유 때문인 줄로만 알았다. 근데 보통,


"...그런 편지에 필요 이상의 의미 부여를 하나?"

"뭐라고?"


저만치에서 다시 비트의 길이를 조절하고 있던 PD는 새삼스레 그가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었는지 다시 되물어왔다.


"어...아무것도 아니야."


평소 작업 때라면 볼 수 없었던 그의 넋 나간 표정을 가만히 보고있던 PD는 그만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재밌냐며 눈썹을 한 번 으쓱하는 것으로 대꾸를 마무리 했으나 그는 무심한 척 나머지 파일들을 저장하면서 한 마디 내뱉었다.


"표정은 꼭 첫사랑에 빠진 소년같아서는."


그 말에 그는 그만 마시고 있던 아메리카노를 울컥 뱉어내고 말았다. 연신 쿨럭쿨럭 기침을 해대며 확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기라도 하듯 손으로 입을 가리던 그는 이내 황급히 작업실을 빠져나갔다.


"...자식, 싱겁기는."


작업실에는 피실 웃는 공허한 웃음만이 맴돌았다.

JM BOTTOM/ONLY SUJ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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