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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소 10

오랫동안 좋아하는 마음을 갖고있던 상대라면 그저 옆에서 바라보기만 해도 뿌듯할 것이라는 말을 과연 누가 한 것일까. 그 말이 틀리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아까부터 1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윤기의 옆 조수석에 앉아있던 지민은 한숨 조차 내쉴 수 없는 삭막한 분위기에 머나먼 창 밖을 응시했다.


윤기의 차에 오르는 것은 지난 결혼식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그 당시에도 편한 분위기였다고 말할 수 있을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지민에게 있어 더욱 목을 옥죄는 외출이었다. 부드러운 승차감을 자랑하는 이 자동차 안이 지민에게 있어 꼭 감옥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몇 개월동안 함께 지내면서 적어도 인사나 안부 정도는 묻고 지낼 만큼 사이가 가까워졌다고 스스로도 생각하는 바가 있으나, 거북한 파티에 가는 길인데다가 그 파티에 윤기를 초대한 장본인이 바로 저인 터라 그와의 거리는 자꾸만 멀리 도망쳐가는 것만 같았다.


참지 못하고 낮은 한숨을 내뱉었을 때, 윤기는 앞만 응시하고 있던 시선을 흘긋 지민에게로 돌렸다. 정장을 입은 모습을 보는 건 웨딩 사진을 찍을 때와, 결혼식을 올릴 때 이후로는 처음인 것 같은데 예나 지금이나 지민에게 정장이라는 단어는 그닥 어울리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기업의 자제라면서 정장을 한 번도 못 입어본 티가 어딘가 모르게 자꾸만 쏟아져 나오니 의심스러운 부분이 조금씩 생겨나는 것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넥타이 메는 법을 몰라 우왕좌앙 화장실 거울 앞에서 끙끙대는 지민을 가만 놔두지 못하고 마주 서서 넥타이를 메어준 것에는 윤기 나름대로의 판단이 있었다.


이상하게 내버려둘 수 없게 만드는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주름 하나 없는 빳빳한 정장을 어디선가 구해와서는 입는 법도 제대로 몰라 끙끙대는 녀석을 어떻게 가만히 둘 수 있단 말인가. 지민과의 결혼으로 인해 잃은 것이 많다고 해도 사람 된 도리는 해야한다고, 윤기는 생각했다.


그런 지민이 집에 나설 때도 그렇고 차에 타서 1시간 여짓 흐른 지금까지도 불안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으니,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아도 자연스레 눈길이 그 쪽으로 향했다. 혹시 멀미를 하는 걸까, 싶어 쌀쌀한 바람이라도 쐬면 기분이 나아질까 싶어 옆 창문을 조금 열어두어도 지민의 그러한 낌새는 사라지지 않는듯 했다.


이런 때일수록 물어봐야만 확실해 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쉽사리 입을 뗄 수는 없는 것이 지민과 저의 거리였다. 윤기 또한 오랜만에 입은 정장이 거북했다. 파티라니, 얼마만인지. 사실 상 이런 대규모의 파티에 초대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긴 하지만.


지민은 파티에 가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나서 그 이후로는 날짜 외의 어떠한 것도 언급하려 하지 않았다. 파티라는 단어만 들어도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 역력했고, 무슨 쓴 소리를 하던간에 애써 웃던 녀석의 얼굴이 어두워지니 되려 윤기도 그러한 주제를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부유하게 자랐던 것도 아니었고, 대기업의 자제가 겪는 일들과는 거의 상반된 인생을 살아왔던 터라 지민의 생각 전부를 다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적어도 어떠한 이유로 이 파티에 가는 것을 꺼려하는지는 왠지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애초부터 이 대기업의 꼭두각시같은 전시품이 될 것이라는 것은 정략결혼을 해야 한다는 지령이 내려왔을 때부터 얼핏 눈치채고 있었다. 그것이 언제가 되었든 간에 대기업의 사위라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고 그 기간이 다만 결혼한 이후로 몇 개월이 지나 발현되었을 뿐. 더 큰 차이는 없다고 윤기는 생각했다.


아마 여러 대기업들의 자제와 간부들이 모이는 이 파티에서 S기업에는 이 정도쯤의 거물이 있다는 것을 자랑할 심산인 것이 뻔했으니. 뭐, 그런 대기업에서 나같은 걸 거물로 봐준다니 고맙게 여겨야 할 부분인건가, 싶은 터무니 없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약해 빠진 정신머리만 있었다면 이 자리까지 올라오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얕보지 말라고."

"네?"

"아, 그냥 혼잣말이야."


속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한 손으로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중얼거려버린 모양이었다. 가만히 저만치를 응시하고 있던 지민은 조그마한 소리에도 금세 반응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찌나 신경이 곤두서있는지를 증명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혼잣말이라며 잠시 신호등이 멈춘 사이 지민과 눈을 맞춘 그는 몇 초 동안 망설이기를 계속했다. 멀미를 하는 것이냐고 물어봐야 할까. 어디 불편한 곳이 있냐고 물어봐야 할까. 그러나 속에 담긴 이야기를 전부 꺼내기에는 신호등의 시간은 너무나도 짧아서.


입을 열기도 전에 그는 운전대를 고쳐 잡을 수밖에 없었다.



-



"초대에 응해줘서 고마워요."

"아니요, 뭘요."


만나는 건 처음인가요? 퍽 다정한 말투. 검정 벨벳 드레스를 입고있는 중년의 여자로 보이는 이사장은 살풋 웃는 얼굴로 윤기에게 악수를 건넸다. 비즈니스적인 웃음을 띠며 악수를 마주잡는 내내 옆에 선 지민은 어딘가 모르게 불안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릴 뿐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지민을 키워줬다고 했던가? 아마 촌수로 따지면 고모가 될 것이라고 들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그 마저도 지민의 형이라고 일컫는 박지훈이라는 작자에게 들은 말이었지만. 지민이 다 클 때까지 키워줬다는 사람이 결혼식에 얼굴도 안 비추는 게 정상인가 싶기도 했지만 대기업의 일들이니까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파티의 순서에 대한 약식적인 설명과 다른 기업들의 대표들과 만나 몇 번 인사를 나누는 사이에 문득 속이 더 무거워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형식적인 인사만 나누는 것이 마치 서로 겉껍데기만 자랑하고 있는 모습인 것 같아서. 지민이 왜 이 파티를 꺼려하는지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이 없는 척을 하긴 해도 지민을 지금껏 길러오면서 들었던 정은 남아있는 것인지 줄곧 저와 지민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는 그의 고모이자 이사장이라는 입장을 가진 그 작자를 윤기는 그저 흘긋 바라볼 뿐이었다. 되려 지민은 어딘가 모르게 아까보다 훨씬 불안해진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멀미 기운이 남아있는 것일까? 이런 저런 걱정을 하던 와중 줄곧 뒤에서만 서있던 이사장은 제법 온화한 미소를 한가득 머금은 표정으로 다시금 말을 걸어왔다.


"뒤이어서 개회사가 있을 예정이니까, 다들 테이블에 앉아서 얘기를 계속 할까요?"

"그러도록 하죠."


입꼬리를 올리며 앞장 서는 이사장의 뒤를 따르려던 찰나 무언가 제 옷 뒤를 잡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설마, 하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조그맣고 하얀 손으로 제 정장 자켓 뒷부분을 꾹 잡은 주인은 지민이었다. 그대로 걸음을 멈추고 잠시 뒤를 돌아보던 윤기는 아무말 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나지막하게 한 마디를 건넸다.


"...왜."

"......"

"속이 안 좋아?"


그 말에 지민은 푹 숙인 고개를 좌우로 가로저을 뿐이었다. 시끄러운 분위기에 파티장. 여러 그룹들의 자제들을 모아 테이블로 향하는 이사장. 밝고 휘양찬란한 조명들. 풍겨나오는 익숙하고도 낯선 클래식 음악. 그 한가운데에 선 윤기는 마냥 지민과 저 자신 둘 만이 어딘가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얘기도 못하는 지민을 어떻게 해서든 무언가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평생을 음악만 바보같이 바라본 그에게 있어 남에게 배려의 행동을 건넨다는 것에는 다소 무리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바보같은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더 일찍 버려버렸어야 했다는 마음이 들었다.


"저번에 걸렸던 감기 기운이 다시 돋은거야?"

"......"


그 말에도 역시나 지민은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억지로 캐묻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혼자 내버려두고 싶지도 않았다. 대답 대신 자켓을 쥔 손에 힘을 더 꽉 주는 지민을 바라보다 그는 나름대로 다정하게 대해보려고 노력하는 투로 입을 열었다.


"...빨리 끝내고 집에 가자."


참 많은 것들을 응축하고 있는 말이었다. 그러고서는 떨어질 기미가 없는 것 같아 보이는 지민의 손을 자신의 자켓으로부터 떼어내어 손목을 부드럽게 잡고서 이사장과 다른 자제들이 모여있는 테이블로 지민을 이끌었다. 여전히 아무 대답도 없고 반응도 없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방금 해준 그 말로 인해서 지민의 불안이 조금이나마 사라졌다는 그런 느낌. 아무래도 파티를 거북하다고 느낀 것은 저만이 아닌 것만 같았다. 어딜 갔다가 이렇게 늦었냐고 장난조로 말하는 이사장의 말에 잠시 몸이 불편해서 그랬다고 답한 것은 어찌보면 본능적으로 나온 보호 본능이었다.


어딘가 모르게 느낌적인 것이었지만, 지민은 이 이사장을 거북하다고 느끼는 것 같았으니까. 사실 왜 그렇게 느끼냐고 물어본다면 답할 말이 없었다. 그저 그렇게 느껴지니까. 그 뿐이었다. 옆에 지민을 앉히고서는 흘긋 바라보자 불안감이 완전히 가신 기미는 없어 보였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나아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윤기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파티에 데려온 것은 정작 지민인데도 불구하고, 온갖 불안을 준 것은 어찌보면 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그와는 정반대로 지민은 다른 고민거리 때문에 한창 속이 들끓는 중이었다.


파티에서라도 고모와 마주치는 일만큼은 없기를 바랐는데. 파티에 오는 것이 처음이라서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조금이라도 윤기에게 솔직해지지 못했던 것에 대한 벌을 받는 것일까. 덩그러니 같은 테이블에 초대 받아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는 꼴을 보자니 속이 뒤틀릴 것만 같았다.


다행인 것은 반대편 옆자리에 윤기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찌보면 그녀의 옆자리가 그가 아니라 자신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기는 했다. 사실 이 파티에 초대받은 것은 고모의 협박 때문이었다고, 어렸을 때부터 줄곧 그녀에게 맞고 자라온 내게 있어 그녀에 대한 불복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고.


그렇게 말해야만 했었던 것일까. 지금에 와서야 후회해봤자 늦었다는 것을 잘 알지만 왠지 모르게 그를 보고 있자면 무력했던 과거가 한없이 부끄럽게만 느껴졌다. 언젠가 용기있게 그녀에게 대척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언젠가'라는 순간을 정하지 않은 채 망각해버리는 제 자신이 미워서. 지금은 그냥 자신이 밉기만 했다.


그에게 파티 내내 돌아다니며 저 대신에 대답을 하게만 했던 것도 영락없이 미안한 꼴이었다. 적어도 장식품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생각만큼은 하지 않게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했는데, 보란듯이 고모님의 기에 눌려 입도 뻥긋 못하는 모습이라니.


이만큼 꼴사나운 일이 어디있을까.


"...지민씨?"

"...네?"


100을 잘해도 1을 방심하면 큰 화를 입게 된다는 말을, 누가 했었더라.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잠시동안의 생각을 하고 있었던 지민은 순간 들려오는 저의 이름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테이블에 앉아있는 수사람들의 눈이 제게로 향해있었다.


"아...죄송합니다...뭐라고 하셨죠?"

"그러니까, 저희 H그룹이 협업을 제시하면 S기업이 받아들일 가능성도 있다고 보냐고 물었습니다."


최악의 짓거리를 해버렸다. 순간 머리가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저희 H그룹이라니. 대기업들의 간부들이 모이는 대규모의 파티에 저렇게 화려한 백금발의 염색을 하고 등장할 간부는 현재 떠오르고 있는 H그룹의 첫째 아들밖에 없다는 사실은 이러한 화제 쪽에 익숙치 않은 지민이라도 잘 알고있는 사실이었다.


최근 H그룹과의 협업을 따내려고 하는 대기업들이 많아졌고, 그 수많은 경쟁 회사들 중에서도 S기업이 뽑힐 것 같다고 기뻐하는 지훈과 고모부의 모습을 본 게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그 자제가 물어보는 질문을 제대로 듣지도 못하고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


저 자신이 무슨 대답을 하는지는 잘 모를 정도로 머릿속은 패닉상태가 되어가고 있었다. 고모님이 죽도록 때려 가르치던 예의범절이 몸 곳곳에 남아있어 어쩔 수 없이 미소를 유지하며 대답하는 수준은 되어갔지만, 대화가 끝이 났을 때 옆을 돌아보면 고모님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도무지 상상하고 싶지 않아 등골이 서늘한 수준이었다.


"...H그룹이 제안한다면 저희 S그룹이 그런 제안을 거절할 리 없지 않을까요?"

"그런가요? 지민씨의 생각이 현실로 이루어졌으면 좋겠네요."

"부디 그렇게 되기를 저도 바라고 있습니다."


이런 간단한 주제에 대한 대화가 길게 이어질 리 없다는 것은 지민도 잘 알고 있었다. 대화가 끝나자마자 순식간에 자제들은 S그룹을 따라잡으려 H그룹의 자제에게 한 마디씩 아부를 하기 시작했고, 다시금 테이블은 시끄러운 대화의 현장으로 바뀌어갔다.


그와 동시에 지민은 입 안이 바싹 바싹 타들어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손이 새하얗게 변할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있던 지민의 어깨에 얼마 지나지 않아 낯선 손 하나가 턱하니 얹어져 왔다. 움찔하고 놀란 지민이 두 눈을 질끈 감기도 잠시, 손의 주인공은 제법 나긋나긋한 말투로 제게 말을 걸어왔다.


"...지민아, 머리가 살짝 헝크러진 것 같구나. 내가 고쳐줄게. 잠깐 복도 쪽으로 나갈까?"


고모님이었다.



-



"고모님, 잠시만요...! 잠시, 잠시만...!"


알고 있었다.


"아!!!"


고모님에게 있어 자비란 없다는 것을. 파티장을 벗어나자마자 우악스럽게 손목이 잡힌 채 지민은 비상구 근처까지 끌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잡힌 손목이 아려왔고 이상하게 눈물이 울컥 솟아날 것만 같은 기분에 속이 울렁거렸다.


밝고 화려한 파티장과는 대조될만큼 어두운 비상구는 빛 하나 들지 않는 것만 같았다. 그 속에서 새까만 벨벳 드레스를 입은 고모님의 모습이 마치 저승사자라도 된 마냥 지민의 눈에는 한없이 무서운 존재로만 인식되어가고 있었다.


잠시만요, 라고 외쳐봤자 예외가 없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눈을 질끈 감아도 그대로 느껴지는 통증들. 처음에는 평소와 같이 발길질로 시작했다가 금세 복부가 아려왔다. 주먹으로 때려맞기도 하고 뾰족한 하이힐에 허벅지가 차이더라도 지민은 신음 하나 내지 않으려 입술을 앙다물었다.


혹여 윤기에게 들릴까봐. 더 큰 소란이 될까봐.


그에게 또다른 상처를 하나 더 남길까봐.


입술이 으득하는 소리를 내며 찢어지고, 그 사이로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다. 괜히 정성스레 차려입은 정장이 소용 없게만 느껴졌다. 눈치 챘어야만 했다. 파티에 간다는 것을 허락했던 그 당시부터 빳빳한 정장이 자신의 집으로 배달되기까지 그 속에 무슨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인지를.


지금껏 지민에게 옷 한 벌 사주기 아까워 돈 한 푼 쓰지 않았던 고모님과 그 가족들이 비싸기도 비싼 정장을 한 벌 통째로 보내는 것에는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잘 됐네. 어차피 그 정장 너 입고 나면 버릴 예정이었으니까."

"...읏...! 잠깐...!"


너처럼 가격도 잴 수 없을만큼 천한 옷이야. 그 말 한마디가 마냥 독을 품은 것 같았다. 분명 온 몸이 아파서, 그런 말 따위가 들릴리가 없는데. 유독 그 말 만큼은 귀에 푹 박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몇 분을 때리고서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그녀는 손을 들어 거칠게 지민의 머리칼을 잡아올렸다.


"잠시만요..., 고모님! 안돼요...! 얼굴만큼은, 얼굴은 안돼요...!"


다리가 풀려 서있을 힘도 없는데. 악력에 의해서 들어올려진 머리칼이 무색할만큼 표정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흘러내리고 있었다. 온 몸이 아픈데도 이상하게 어디선가 집요한 구석이 생기는 것만 같았다. 얼굴만큼은, 지켜야만 했다.


다른 어디를 맞더라도, 얼굴만큼은 맞아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상처 자국이 눈에 띄는 곳에 있었다가는 파티장에 돌아갔을 때 윤기의 얼굴을 볼 낯이 없었다. 가뜩이나 눈치도 빠른 그가 단숨에 맞았다는 사실을 알아챌 것이 뻔했으니까.


맞았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어떤 미움을 받는 존재가 되어도 상관 없었다. 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S기업에서 수치가 되고, 지금껏 나는 쓰레기같은 취급을 받으며 살아왔어요, 나는 살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는 취급을 받고 살아왔어요, 그 몇 마디가 죽도록 하기 싫었다.


차라리 그에게 있어 재수 없는 어느 대기업의 온실 속 화초같은 도련님 취급이 더 나았다.


차라리 평생 그가 나를 미워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평생 그가 나를 미워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그가,


얼굴만큼은 때리지 말아달라고 작은 목소리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뺨을 때릴 작정인지 매서운 손이 올라가는 것은 금방이었고 마지막 무언가를 생각해내지도, 입을 열지도 못한 지민은 그저 두 눈을 질끈 감을 뿐이었다. 턱 막혀오는 숨을 억지로 들이키며 온 몸에 힘이 들어갔을 때.


짝, 하고 날카롭고도 거센 마찰음이 비상구 내에 크게 울렸다.


"...어?"


그와는 반대로 의아하게도, 볼에 느껴져야 할 통증이 느껴지지가 않았다. 분명 찢어질만큼 아린 통증이 느껴져야 하는데, 그런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머리칼을 잡은 손에 힘이 빠져들어간다는 사실만을 느끼며 온 몸을 벽에 기댈 분이었다.


가까스로 두 눈을 뜨자 앞에 있는 것은 왠지 모르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향기를 풍기는 인물.


"...일어설 수 있어?"


윤기였다.


이상하게 그렇게 다정한 말투도 아닌데, 어딘가 모르게 화나 보이는 듯 눈썹이 치켜올라간 상태의 얼굴인데. 이상한데, 분명히 이상한데. 지민은 흘러나오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흐느끼는 소리를 내지도 못할 정도로 어딘가 망가져 버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기도 잠시 그는 몸을 굽혀 지민의 무릎과 허리에 손을 넣고서 힘없이 축 늘어져있는 지민을 단숨에 안아들었다.


내려달라고, 분명 말해야 하는 타이밍인데. 가까이 안아서 들어올려지자 어느새 스며 들어온 것인지 비상구 윗칸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그의 왼쪽 뺨이 잔뜩 부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눈물이 한가득 나오는 상태라서 시야가 흐렸지만, 그 정도는 알 수가 있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그에게 내려달라고 말하지도, 반항을 하나 하지도 못한 채 그저 품 안에 안겨 그의 향기를 코끝에 가득 담을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인지 그대로 벙쪄 잠시 동안 윤기를 향해 삿대질을 하던 고모님은 지민을 내려달라는 둥 뭐하는 짓이냐는 둥 되도 않는 변명거리를 늘어놓다가 이내 자신을 뚫어져라 노려보는 윤기에 의해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런말 까지는 안 하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

"그 쪽 수준, 생각보다 최악이네. 알아?"


뒤이어 계단을 내려가는 것만 같은 느낌에, 멀어져가는 고모님의 모습에, 낯서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안정시켜주는 그의 향기에 취해서.


지민은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JM BOTTOM/ONLY SUJ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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