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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 로테이션 06

대기실로 들어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언제 또 옷을 갈아입었는지 편안한 반팔 차림으로 기다리고 있는 지민과 눈이 마주쳤다. 이런 상황이 될까봐 스트레칭, 안하겠다고 한건데. 윤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와 같은 공간에 단 둘이 있는 것은 언제가 됐든 상대가 누구라도 불쾌했다.


사실상 사람과 어울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기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저번에 지민이 집으로 청소하러 들어왔을 때도 빨리 내보내려했던 이유가 그 중 하나고. 나머지 다른 이유들은 박지민이 집에 있다가는 또 무엇이든지 사고를 일으킬 것이라는 사실. 또 다른 이유는 왠지 모르겠지만 집 안을 돌아다니고 있는 지민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혔기 때문일까.


어찌되든 상관없었다. 지금 지민과 함께 단 둘이 대기실에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으니까.


"그래서. 뭐부터 해야하는데."


이미 한참 전에 몸을 푼건지 벤치에 발을 올리고 이리저리로 몸을 쭉쭉 늘리고 있는 지민은 어느새 폴라티로 갈아입고 나온 윤기를 보며 베시시 웃었다.


"일단 허리부터 할까요? 자, 이렇게 바닥에 앉아서..."


먼저 시범을 보여주겠다고 부드러운 바닥에 앉은 지민은 양다리를 일자로 벌리고 쭉 밑으로 허리를 내렸다. 피겨에는 유연성이 필수였기 때문에 이 정도야 윤기도 익숙했지만. 마주보는 쪽에 똑같이 앉아 같은 자세를 취하자마자 그는 스트레칭을 같이 해주겠다고 했던 말을 후회했다.


"야."

"네?"


쭉 내려간 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헐렁한 지민의 라운드 티 목부분이 늘어져 그대로 상체 안이 드러나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르자마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듯 천진난만하게 대답하는 모습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진짜 애가...멍청한 건지..."


그대로 일어나서 입고있던 져지를 벗고 지민의 위로 던졌다. 애초에 이렇게 추운 빙상장에, 반팔이 말이돼? 저번에 새벽에도 추워서 덜덜 떨던 그의 모습을 회상하며 미간을 구겼다. 자기 몸 정도는 챙기란 말이야. 이상하게 그런 부분에 대해서 짜증이 났다.


"네?"

"입으라고."

"아...저 괜찮은데요?"

"......"


괜찮다고 말하자마자 매섭게 노려보는 눈에 알겠다고 웅얼거리며 져지에 두 팔을 넣었다.


"지퍼."

"뭐가요?"


지퍼라는 말에 흘긋 제 아래를 내려다본 지민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윤기를 응시했다. 그 쪽에서는 적잖게 답답했다. 말을 한 번 하면 저렇게 못 알아듣나?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상대가 지민이라는 것을 이내 깨닫고 그럴수도 있겠지, 수긍하는 윤기였지만.


"잠그라고."

"왜요?"

"아니..."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이라서 말해야 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다가 기어이 한숨과 함께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린 윤기는 딱 한마디했다.


"안에 보인다고, 너."

"네...?"

"......"

"...아"


순간 정적이 흐르고 나서야 윤기의 말뜻을 깨달은 지민의 얼굴이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죄, 죄송합니다. 사과까지 연달아 하고서는 급하게 지퍼를 채우자 그제서야 만족했는지 지민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윤기는 말을 이었다.


"스트레칭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가서 이온 음료나 좀 사와."

"아...그래도..."

"이 자리에 또 둘이 있기 싫은 건 네 쪽도 마찬가지일텐데."

"......"


윤기의 차가운 말에 입을 꾹 앙다물었다.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닌데. 이런 분위기 속에 같이 있고 싶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떨어지기에는 싫었다. 그런 마음을 알리지도 못하고 끙끙 앓는다는 게 어찌보니 슬프기도 했지만 윤기의 말이 그렇게 거짓말도 아닌 것 같아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면,"

"......"

"이런 분위기에도 또 스트레칭을 하고싶어?"

"...아니요."

"가서 사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서 건네주는 걸 받아들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윤기는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 더 덧붙였다.


"가서,"

"네...?"

"너 먹고싶은 것도 하나 사오던가."

"아..."

"배고프잖아. 나 기다리려면."


그 말을 끝내고 밖으로 먼저 나가버리는 윤기의 뒷모습만 바라보다 눈을 질끈 감았다.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대기실이 왠지 모르게 추운 분위기가 느껴졌지만 윤기가 준 져지 덕분에 몸 자체가 춥지는 않았다. 키는 비슷하면서 체격 차이는 또 나서 자신의 옷보다 배는 더 큰 사이즈 탓에 져지 밖으로 손이 드러나지를 않았다.


윤기가 건네준 카드를 왼손에 쥐고 다른 한 손을 들어 코에 갖다댄 지민은 얼굴을 붉혔다.


"...윤기씨 냄새 난다."


알싸하면서도 시원한 향. 평소 향수를 잘 뿌리지도 않는다면서 그의 집도 그렇고, 그의 물건에도, 그의 옷 모든 것에 시원한 향기가 묻어있었다. 그의 이미지 다웠다. 보인다면서 져지를 던져주는 것도 그렇고 먹고싶은 거 하나 사오라고 카드를 던져주는 것도 그렇고.


"아 어쩌지..."


피실 웃어주던 모습들과 스트레칭은 같이 해주겠다는 말투도 언뜻 보이는 차가운 면도 언뜻 보이는 다정한 면도.


"나 역시 저 사람이 너무 좋아..."


이상하게 울컥 눈물이 나왔다.



-



"4500원 입니다."


네, 카드요. 이온 음료와 과자 한 봉지를 산 지민은 얼마 울지도 않았는데 이미 부어버린 눈을 슥슥 비볐다. 울었다는 거 눈치 채면 어떡하지. 훌쩍 코를 들이마시고 봉투에 담긴 걸 챙긴 지민은 밖으로 그대로 나오려다 카드 받아가라는 직원의 외침에 아차, 싶어 다시 들어갔다.


"또 덜렁거렸다..."


언뜻 웃으면서 카드를 받아든 지민은 그대로 연습장으로 걸어갔다. 지금쯤 연습 시작하고도 한참 됐겠지? 뭐하고 있을까. 한 손으로 열기도 버거운 문을 애써 열었더니 웬일로 링 위에는 윤기 한 사람밖에 없었다. 평소라면 사람이 가득해서 짜증을 냈을 그도 오늘만큼은 편하게 연습하고 있었다.


한참 연습에 열중하는 것 같길래 방해하기 싫어서 링 근처 벤치에 앉았다. 얼음을 가르다가도 단숨에 하늘로 뛰어오르고 다시 내려오기를 여러번. 얼굴에서 뚝뚝 떨어지는 땀이 마치 눈의 결정같아 보였다. 피겨 스케이팅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편이었는데.


뒤늦게서야 '4회전 플립'이니 뭐니 여러가지를 검색해 봤지만 우선 4회전 플립은 프로들도 성공하기 어렵다는 어려운 기술. 그걸 해내려고 그렇게나 열심히 하더니. 안타까운 건 그렇게 해서 어느 순간 성공시켰는데 그 이후로는 단 한번도 다시 성공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링 전체에 울리고 있는 곡이 막바지로 치달을 쯤 끝까지 스피드를 내서 발돋움을 한 그는 역시 예상대로 넘어졌다. 넘어지는 것에도 요령이 생긴 것인지 그 마저도 아프게 넘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걱정이 되는 건 역시나였다. 입 모양으로 욕을 여러번 하더니 짜증난다는 듯 마른세수를 한 그가 링 밖에서 이 쪽을 쳐다보고 있는 지민과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언제 들어온거야, 그렇게 생각하기를 잠시. 참 존재감 없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일어서서 잠시 쉬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해서 링 밖으로 나갔더니 저만치서 뛰어오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온 음료 사왔어?"

"네!"


환하게 웃으면서 품에 있던 음료수 병을 건네주길래 그대로 받아 연달아 몇 입을 마셨다. 갈증이 없어질 때까지 그렇게 한참을 붙들고 있던 그는 입에서 음료수 병을 떼고 크게 한 번 숨을 몰아 내쉬었다.


"먹고싶은 건 뭐 사왔는데."

"과자요."


그러고보니 품에 제법 앙증맞은 사이즈의 과자가 들어있었다. 이왕 살거면 큰 걸 살 것이지. 간도 작다 싶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왜, 왜 웃는데요? 그 사이에 또 발끈해서 뾰로퉁해진 지민의 얼굴을 보다가 상대하기도 귀찮아져서 관두라는 식으로 손을 내저었다.


어, 근데 언뜻 보니 지민의 눈가가 조금 빨갛다. 웃고 있으면서도 자세히 보니 살짝 부은 게 누가 봐도 운 것 같은 티가 잔뜩 나는 얼굴에 표정이 조금씩 굳어갔다. 그걸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갑자기 심각해지는 그의 표정에 지민은 그저 끙끙댈 뿐이었다.


"왜요...?"

"...아무것도 아니야."

"아."

"그보다 나 배고픈데."

"네?"


도시락 싸오지 않았어? 그 말 한마디에 또 얼굴에 화색이 돈다. 들고 왔다면서 환하게 웃는 지민을 보다가 벤치에 앉았다. 가져오라는 소리를 하지도 않았는데 헐레벌떡 대기실로 뛰어가는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어제 그냥 반 장난으로 도시락을 먹는다고 했던 것인데.


어찌 저렇게 말에 충실한지. 왜 네가 싸온 걸 모르겠어. 아침에 짐은 다 팽개쳐 두고 품 안에 꼭 안고있던 게 도시락 통인데. 무거워 보이길래 들어주겠다고 해도 비몽사몽 몽롱한 얼굴로 '윤기씨 도시락'이라고 연달아 중얼거리던 그 모습이 머릿속에서 잊혀지지를 않았다.


신나서 도시락 통을 가져오는 모습을 보다가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라는 손짓을 했다.


"드세요!"


도시락 뚜껑을 열자마자 드러나는 실체에 눈이 커졌다.


"네가 만든거야?"

"네!"


요리에 능숙할 것이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솜씨에 감탄하며 턱을 괬다. 제법이네, 그렇게 말을 해주자 뭐가 또 그리 행복한지 웃기만 하는 지민을 흘긋 보다가 젓가락을 들었다. 한 입 넣자 평소에 먹던 음식들보다 배는 맛있는 맛에 말없이 먹기만 했다.


"맛있어요?"

"......"

"어때요?"

"......"

"말 좀 해줘요, 윤기씨..."

"그냥 먹을만해."


김빠지는 윤기의 칭찬에 어깨가 축 처졌다. 쌀쌀맞은 그에게 칭찬을 바라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맛있다는 말은 듣고싶었는데. 먹을만 하다는 표현이 진실인 것처럼 표정 변화 하나 없는 얼굴에 그냥 칭찬같은 건 바라지 않고 옆에 앉아있기로 마음 먹었다.


"자주 싸와."

"네?"

"맛있다고."


눈도 맞추지 않고 하는 말이었지만 그럼에도 기뻐서 입꼬리가 올라갔다.


"왜 그렇게 웃는데."

"좋아서요."


당돌한 대답에 입을 열어 뭔가를 말하려 하다가 다시 입을 다문 윤기였다. 맛있다는 말이 그렇게 좋나. 알 턱이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고. 윤기가 마지막 한 입까지 다 먹기를 기다리던 지민은 말끔하게 비워진 도시락을 뿌듯한 얼굴로 품에 안았다.


"그걸 또 왜 안아."

"좋아서요."

"아서라."

"그래도 좋은데요."


노려보자 알겠다고 말하면서 입꼬리를 축 내리는데 한 달이 훨씬 지난 지금, 생각보다 본성이 드러나는 지민의 모습에 놀란 적이 한두번이 아니라는 걸 최근 들어 느꼈다. 본연의 모습이 지금에서야 드러나는 것도 이상하지만 일단 첫번째로 윤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더 바보같단 말이지."

"네?"

"됐다. 못 들은 걸로 해."


삐죽 입을 내밀다가도 머리에 뭔가 생각났는지 웃으며 지민은 다시 말을 걸어왔다.


"윤기씨."

"왜."

"저희 다음주에 일본 가잖아요."

"어."

"가서 곧장 연습장으로 갈거예요?"

"어."


단호하게 들려오는 말에 입꼬리를 푹 내렸다.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달라질 게 없는 현실에 고개만 푹 내렸다. 솔직히 기대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국가대표 매니저한테 뭘 바라냐 싶었지만 또 괜스레 아쉬운 게 현실이었다.


"그리고 박지민."

"네?"

"일본 간다는 말, 꼭 놀러간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내 착각인가?"

"......"


확실하게 말하는데 우리 놀러가는 거 아니야. 딱딱한 말투에 몸이 우뚝 굳었다. 이 쪽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거는 통에 허투루 대답을 할수도 없었다.


"전지 훈련 가는거야. 알긴 알지?"

"네에, 알아요."

"알면."


그런 울 것 같은 강아지 표정 짓지마. 그렇게 말하고서는 다시 연습하겠다고 링 위로 올라가는데 잠시동안 불만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다가 순간 윤기가 그대로 링 위에 올라갔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황급히 달려갔다.


"윤기씨!!! 식후 30분 쉬어야 돼요!!!"


들은 척도 안했다.

JM BOTTOM/ONLY SUJ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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