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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 로테이션 21

한참동안 지민이 우는 것을 달랬다. 달래고, 또 달래도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며 흐느끼는 그 아이를 품에 안고서 연신 괜찮다는 말만 반복했다. 서럽게 울다가도 잦아드는가 싶더니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뚫어져라 보던 지민은 다시 연신 눈을 부볐다.


"하지마. 눈 아파."

"그치만..."


쓰읍, 단호하게 말하며 눈가에 가져간 손을 잡으니 눈을 맞춰오는 지민에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를 울린다는 것은 언제나 기분이 마냥 좋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물론, 상대가 싫어하는 쪽이라면 통쾌했겠지만 눈물을 쏟아부은 쪽은 지민이었고, 게다가 울린 상대가 자신이라니.


허탈해서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감동 받아서 운 거라고 뒤에 덧붙이기는 했지만. 나 원 참, 사람 놀래키는데는 뭐 있다니까. 한숨을 푹 내쉬면서 품에 안긴 지민의 정수리만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턱하니 얹고 두 어번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손길을 느껴서인지 이내 고개를 든 지민과 눈이 마주쳤다.


한참 울어서인지 붉어져있는 눈이 어찌나 매혹적이던지. 아파트 단지만 아니었다면 그대로 키스할 뻔 한 것을 꾹 눌러참았다. 한참동안 말이 없던 지민은 무언가 말하려 입을 벙긋하더니 이내 살짝 웃어보였다. 그 웃음이 왠지 지금까지 봐왔던 웃음들과는 사뭇 다르다는 느낌이 들어서 이번에는 함께 웃어주지 않았다.


"왜 그렇게 웃어."

"그냥...조금...벅차서..."


벅차? 생각하지도 못한 지민의 발언에 얼굴만 굳어져갔다. 벅차다니. 뭐가. 뭐가 벅찬건데. 차마 그 말만큼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목구멍 안에서 맴돌았다. 후에 들려올 대답이 조금 무서워졌기 때문일까. 입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 그게 아니고...!"

"......"


차갑게 무표정이 되어가는 윤기의 얼굴을 바라보다 황급히 말을 고쳤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사람이 어떻게 이리 말이 서툰지 자꾸만 목적을 잃어가는 말에 괜히 속상했다. 사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감동해서 그것에 대해 다른 말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반지 이외에 그 무엇을 줬다고 하더라도 아마 감사히 받았을 것이고 그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겼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반지는 평소보다 배는 더 소중한 의미를 상징했다. 윤기의 잡지 기사를 훑어본 몇 사람이라면 알 것이 분명했다.


그의 성격이 누군가와 엮이는 것을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라는 것 쯤은. 그래서 지금까지 스캔들이 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알고있었다. 반지의 의미를 그가 모를리도 없고. 굳이 선뜻 먼저 건네준다는 것에 뭉클해지면서도 한 편으로는 벅찼다.


과연 이렇게까지 사랑받아도 될 일일까. 항상 그랬다. 인생은 참으로 지민에게 불공평해서 무언가 하나라도 행복한 게 있다면 앗아갔다. 그 무엇이라도 대상이 되었다. 무용, 친구, 직장, 공부, 학점. 이 외에도 다양했지만. 그 모든 인연들이 이끌어줘서 만난 것이 바로 지금의 윤기였다.


지금까지 만난 그 어떤 사람보다 무뚝뚝하고, 차갑고, 냉정하면서도. 그 누구보다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사람. 그것이 바로 지민의 마음 속 한 구석에 자리잡힌 '민윤기'라는 사람의 정의였다. 그는 지민에게 참으로 여러 의미를 안겨준 사람이었다.


그래서 소중했다. 그래서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 더, 사랑했다. 잃게 될까봐. 또 무언가를 잃게 될까봐. 그런 와중에 반지를 선물 받다니. 솔직히 말해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벅차다는 말은, 그의 그 무엇도 부담스럽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감정이 벅차올라서요..."

"뭐?"

"저...이러다가..."


또 불행해지면 어떻게 하죠. 점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차마 고개를 들어 윤기를 바라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할까. 바보같다고 할까. 어리석다고 할까. 한참동안 고개만 숙이고 차갑게 식어버린 신발 끝을 바라보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박지민. 고개 들어."


우물쭈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올리자 마주하는 건 놀랍게도 피식 웃고있는 그의 얼굴이었다. 화낼 줄로만 알았던 그가 저렇게나 웃고있으니 당황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어버버 입만 벙긋거리다가 목소리 톤을 높여서 소리를 빽 질렀다.


"장난하는 거 아니라고요 나!!!"

"누가 장난한대?"

"아니...방금 웃었잖아...요..."

"너 귀여워서 그래, 임마."


그 말을 하고서 딱밤을 세게 먹이더니 이내 그는 커다랗고 하얀 그 손으로, 지민이 너무나도 사랑하는 그 손으로 두 뺨을 맞잡아왔다. 분명 차가운 손인데도 볼에 닿자 왠지 모를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아 괜스레 심장이 쿵쿵 뛰었다.


다음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너무나 잘 알기에. 가까이 다가오는 그의 시선을 느끼며 그대로 눈을 살며시 감았다. 입술에 느껴지는 말랑한 감촉에 움찔하기도 잠시, 곧장 떼어지는 그 느낌에 아쉬운듯 입을 열었다 닫았다. 눈을 뜨자 윤기는 지민과 시선을 마주하고서는 다시금 입을 맞췄다.


"어지간히도 내가 좋은가보네."

"무, 무슨...!"

"아니야?"


금세 또 정색하는 그를 바라보다가 황급히 맞다고 말을 수정했다.


"맞긴 한데..."

"그러면 됐어."

"......"

"왜 불안한 건데."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으면서도 볼을 쓰다듬어 주는 손길이 너무 다정해서 무심결에 또 울컥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 손길을 가만히 느끼다가 위에 자신의 손을 겹친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저는 지금까지 항상 행복하면 불행해졌거든요."

"......"

"무용도 그랬고...대학도 그렇고...그냥 여러모로 다..."

"박지민."


네? 말을 하다말고 뚝 끊어버리는 그에 고개를 들었다. 아까보다 훨씬 차가운 얼굴로 보고있었다. 시선이 딱 허공에서 마주쳐서 피할수조차 없었다. 가만히 그의 눈동자만 바라보다가 입만 달싹였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먼저 웃은 쪽은 윤기였다. 이빨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 미소. 딱 지민이 좋아하는 웃음이었다.


"이번만큼은 그거 빗나갈 것 같은데?"

"네...?"

"나는 행복하면 행복해지고. 불행해도 행복해지거든."


자신만만하게 웃는 표정은 남으로 하여금 어떻게 반박할 여유를 만들지 못하게 하였다. 무슨 말을 하려나 싶었건만 단순히 지민을 안심시키고 싶어 하는 말인지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속을 알수가 없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렇게 작은 말 한마디가 자신을 안정시켰다는 것이었다.


다정하게 웃어주며 볼에 올라가있던 손을 머리로 옮겨 부드럽게 쓸어내려주는 것을 보고 얼굴을 붉혔다. 사귄지 꽤 된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아직 이런 일만큼은 익숙하지 않았다. 너무 설레고, 너무 좋아서. 그대로 주저앉아버릴 것만 같았다.


"미안해요..."

"뭐가."


갑자기 미안하다고 말하는 지민을 보고 단순한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틈만나면 사과하는 게 그 아이의 특징이었으니. 막아야 겠다는 투철감은 없었지만 그 '사과'의 대상이 본인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다. 한참동안이나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가만히 윤기의 눈치를 보던 지민이 입을 열었다.


"다음주부터 대회 기간이잖아요...근데...벌써부터 걱정거리 만들어서..."

"내가 말했지."

"네?"

"난 행복하면 행복해지고 불행해도 행복해진다고."

"......"

"걱정하지 말라고 간단히는 못 말하겠어. 근데,"


내가 옆에 있잖아. 그 소리에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는 지민과 시선을 맞췄다. 눈물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커다란 눈망울.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맞췄다.



-



"미친. 넌 진짜 친구 좋다는 게 무슨 말인지도 모르냐?"

"뭐가."

"씨이..."


아까부터 짐을 싸는 것을 도와주겠다며 한걸음에 달려온 태형은 예상과는 달리 불만 투성이에, 입은 댓바람만큼 나온 상태였다. 어쩐지 평소에 무엇을 하던간에 전부 귀찮아하던 그가 순순히 도와준다고 할 때부터 이상했다. 맛있는 걸 사준다고도 하지 않았는데 따라온 걸 보면. 의심해봤어야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까부터 짐을 싸는 걸 도와주기는 커녕 소파에 아예 자리를 잡고 누워서는 일명 '징징 거리기'를 시전 중이었다. 캐리어에 다 들어가지도 않는 짐들을 꾹꾹 눌러싸며 하염없이 태형의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듣고있다가 기어이 폭발했다.


"아 좀!!! 한가지만 해!!! 짐싸는 걸 돕던가!!! 아니면 가만히 있던가!!!"


빽 소리지르는 것에 놀라긴 놀랐는지 움찔하다가 기어이 벌떡 일어서는 것을 노려봤다. 갑자기 왜 화를 내고 난리냐며 중얼거렸지만 안중에도 없었다. 당장 내일 러시아로 출국해야 했으니까. 드디어 대회 기간이었다. 선수가 아님에도, 자신의 담당 선수가 대회를 나간다는 그 사실 한가지만으로 예민해질 수 있는 시기였다.


그런데 3살부터 소꿉친구라는 놈은, 돕지도 않고 저러고 있으니. 짜증이 안날래야 안날 수가 없었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다스리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짐까지 잘 들어가지 않자 짜증 수치가 확 치솟아오른 지민은 그대로 캐리어를 저만치로 밀어버렸다.


"아 짜증나!!!"

"그러게 누가 그렇게 고사리같은 손으로 짐을 푹푹 누르랬냐? 잘도 들어가겠다."

"도와주던가!"

"그래서 지금 가잖아."


퉁명스럽게 툭툭 내뱉는 말에 같은 말투로 되받아쳤다. 대체 뭐가 그렇게 불만인건데. 내가 말없이 내일부터 러시아로 가서? 그럴리가. 평소에 여행이라면 눈곱만큼도 관심 없는 녀석이. 자기 과에 예쁜 애가 있느냐 없느냐. 소개팅 날짜가 언제냐에 목숨을 걸 녀석이지, 이런 것에 목숨을 걸 녀석은 아니었다.


저만치 밀어버린 캐리어를 끌고와서는 무릎으로 세게 꾹 누르며 지퍼를 단숨에 잠근 태형은 그 무거운 것을 다시 들고와 지민의 옆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그러고서는 한숨을 푹 내쉬는게 평소와는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을 느끼게끔 만들었다.


"왜. 뭔데. 뭐가 불만이야."

"아니..."

"뭐."

"어떻게 민윤기 선수랑 사귄다는 걸 나한테 안 말하냐???"


가만히 치근덕대며 물어보자 참다 참다 폭했는지 버럭 목소리 톤을 올려 물어오는 태형을 보고 움찔했다. 아니 얘가 왜이래? 눈을 두어번 깜빡이다가 허, 하고 낮은 실소를 지어보였다. 아직도 제 화를 누르지 못하겠는지 씩씩 거리던 그는 이내 눈을 휙 돌려버렸다.


"아니...너 진짜 그것 때문에 나한테 서운하다고 그렇게 티 팍팍 내는거야?"

"어!!! 그럼 안 서운하냐?"

"어쩔수가 없었어. 러시아에 갔을 때 고백받았고 어쩌다가 사귀게 된ㄱ..."

"전화 정도는 해줄 수 있었잖아."

"그건..."

"내 말이 틀려?"


맞긴 한데. 웅얼거리며 말하자 그제서야 다시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는 태형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윤기씨와 사귀는 걸 자신에게 제일 먼저 말하지 않아서 화가 나셨다? 피실 웃은 다음 다른 옷가지들을 집어들어 다른 가방에 쑤셔넣기 시작했다.


"왜 무시하는데?"

"무시하는 게 아니라. 어이가 없어서 그래, 어이가."

"뭐가."

"애초에 내가 왜 그걸 너한테 말해야 하는데?"

"나는 여자친구 생기면 너한테 제일 먼저 말하니까!!!"


누가 알고 싶대? 툭 쏘아붙이자 본인도 그런 적이 없다는 것이 생각 났는지 이내 입을 꾹 다물어 버리는 것을 바라봤다. 그랬다. 원하지도 않는데 전여친과 헤어진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클럽에서 새 여자친구를 사귀었다며 자랑까지 하던 녀석을 지민은 생생하게 기억하니까.


태형의 얼굴은 객관적으로 보아도 잘생긴 편이었다. 그 덕분에 어릴 때부터 꾸준히 여자가 들끓었고. 지민과는 달리. 자신의 오래된 소꿉친구가 누구를 사귀던간에 별 상관 없었다. 그저 막되먹지 않은 놈이면 됐지. 그런데 역으로 애인이 생긴 자신에게 먼저 말해주지 않은 것에 대해 서운해 한다니.


생각하지도 못한 전개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대쪽을 보자 마치 자신을 보라는듯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는 태형과 눈이 마주쳤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넌 친구도 아니야."

"뭐래. 그거 하나 안 말해줬다고 나 친구 아니라고?"

"나 삐졌으니까 알아서 해."

"자기 입으로 삐졌다고 말하는게 삐진거냐?"


흥! 고개를 휙 돌리는 태형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으니까. 이리 와서 옷 넣는 거 도와. 말해주지 않은 건 내가 잘못했어. 인정할게."

"진짜???"

"응."


고개를 끄덕이자 언제 그랬냐는듯 다가와 옷을 손에 쥐는 게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내가 얘 데리고 23년동안 대체 뭘 한거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 차는 소리를 냈다. 뇌구조 단순한 건 대학교를 들어와도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어?"

"국가대표랑 어쩌다가 만나게 된건데."

"뭐...그냥...어쩌다보니..."

"누가 먼저 좋아했어? 민윤기 그렇게 안 생겼던데...너냐?"

"뭐래!!!"


갑자기 생긋 웃으며 어깨를 툭툭 치는 그를 보고 얼굴을 확 붉혔다.


"맞네. 얼굴 빨개지는 거 보니까. 너 거짓말 못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아니거든!!!"

"언제부터 좋아진건데. 그 선수 성격 더럽다고 소문 자자하던데. 너, 혹시 얼굴보냐?"

"아니라고!!!"

"아니지. 얼굴 보는 사람이면 나를 가만히 놔뒀을 리도 없고."


농담이 아니라는듯 턱을 두어번 쓸어올린 그는 다시금 눈이 마주치자 지민을 향해 피실 웃어보였다.


"...그 지랄맞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온거야?"

"내 마음?"

"아 너 그냥 집 가!!!"


결국 소리를 빽 질렀다.





JM BOTTOM/ONLY SUJ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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